
“갓 쓰고 도포 입었다고 모두 선비는 아니에요. 계층 개념인 양반과 달리 선비는 바른 행동의 척도와 가치관을 의미해요. 21세기 한국에서도 교육받은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단죄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런 선비 정신이 한국적인 정체성이고 널리 알려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X선비’라는 비속어가 연관 낱말로 등장할 정도로 어느샌가 ‘선비’ 하면 고루한 ‘꼰대’ 이미지가 강해졌다. 그런데 재미교포 출신 문화유산 저널리스트 강형원(62) 작가는 ‘선비 정신’이 우리 문화의 근간이라고 말한다. 지난 8일 출간된 영문 도서 『Seonbi Country Korea, Seeking Sagehood(성인군자의 길을 간 한국은 선비의 나라)』(한림출판사)를 통해서다. 미국 백악관 사진 담당을 포함한 33년간의 사진기자 생활을 접고 2020년 고국에 돌아와 5년간 카메라로 포착한 ‘선비 문화’ 유산들을 한데 모았다.

예컨대 전북 정음 무성서원에서 그가 발견한 편액 속 파명(破名) 흔적을 보자. 통일신라기의 학자 고운 최치원(857~?)을 기리는 이 서원은 세속적 출세를 금기시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곳 선비들 명단에서 이름을 들어냈다는 건 서원의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강 작가는 “이름을 파내고 없던 인물처럼 함으로써 명예·청렴·인격 등 선비라면 지켜야 할 가치를 강조한 셈”이라고 했다.
그가 파악한 선비의 다섯 기둥은 ‘인(仁, Discipline), 의(義, Courage), 예(禮, Inclusion), 지(智, Wisdom), 신(信, Honor)’이다. 여기에서 인은 ‘자비, 사랑’보다 ‘바른 됨됨이’에 가깝다. ‘규율, 수련’에 가까운 영어 단어로 풀이한 것도 자신을 수양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덕성이 ‘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밥상머리 교육’도 ‘인’에서 시작한단다.
“어릴 때부터 늘 듣는 게 ‘어른에게 예의를 갖춰라’ ‘옷을 단정히 입어라’잖아요. 지금 K팝 아이돌이 전세계적으로 호감을 사는 것도 이런 품성에다 자신을 단련하는 전문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죠.”
강 작가는 1975년 중학교 1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 LA타임스, AP통신, 로이터통신 등의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1993년 한인 최초 퓰리처상에 이어 1999년 두 번째 퓰리처상을 탔다. 앞서 2022년 “문화유산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색하겠다”며 펴낸 책이 『사진으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Visual History of Korea)』(전 2권)이고 이번 책은 이 과정에서 주목한 ‘선비 정신’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 삼국시대부터 광복 전후까지 한국사를 주요 인물 위주로 풀었다.



가령 세종은 애민정신에 바탕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데서 보이듯 ‘선비 군주’라 할 만하다. 문무를 겸비하고 환란에 대비했던 충무공 이순신은 선비의 표본이다. 유배 중에 ‘세한도’를 남긴 추사 김정희, 수백권의 저서를 쓴 다산 정약용과 안창호·안중근 등 독립지사도 ‘선비 정신’에 바탕한 한국인의 도덕 모델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면면한 흐름을 사인검(四寅劍, 조선 왕이 선비에게 선물하던 주술적 용도의 칼), 한량무(선비 춤) 등에서 찾아 사진 212장을 곁들였다.
다음 작업은 훈민정음 표기를 통해 대표적인 영어 단어 1000개 발음을 정확히 하도록 돕는 책을 쓰는 것. “세종 창제 당시 자·모음 28자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24자로 간소화된 건 한글의 큰 손실”이라면서다.
“순경음 비읍(ㅸ)을 활용해서 보이스(boys, 소년들)와 ㅸㅗ이스(Voice, 목소리)를, 순경음 피읖(ㆄ)을 활용해서 패션(passion, 열정·수난)과 ㆄㅐ션(fassion, 유행)을 구분할 수 있죠. 훈민정음 초성 17자와 중성 11자만 있으면 영어 알파벳을 표현 못할 게 없어요.”

이 같은 훈민정음 되살리기 운동 차원에서 해례본에서 추출한 글자로 의류 도안도 제안했다. 한 스포츠용품 업체가 이를 수용해 제작한 ‘훈민정음 티셔츠’가 서울 명동 매장에서 외국인들에게 인기리에 팔리고 있단다.
이번 책은 한국 국가유산을 외국인의 시각에서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시리즈 10종 중 첫째 권이다. 해외도서 전문 출판을 해온 한림이 국가유산청과 공동 기획해 지난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먼저 소개했다. 영문으로 쓰인만큼 외국인 및 해외 한인 독자가 기본 타깃이지만 “우리나라 미래 세대에게도 도움 되고 싶어” 한글 번역판도 논의 중이다.






 오십의 문을 여는데 용기가 필요한 분들에게](https://www.domin.co.kr/news/photo/202512/1538315_738603_365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