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중 이완용만큼의 악인들은 꽤 있다. 그럼에도 이완용이 대표적인 친일파로 불리는 이유는 거의 이름 석 자를 역사 문서에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정미늑약, 한일강제합병 모두에 결정적 역할을 한 전무후무한 자가 이완용이다.
이런 이완용이 대표적인 친일파로 이름 석 자를 박아 넣기 시작한 사건이 우리의 외교권을 일본이 빼앗은 ‘을사늑약’이다.

1905년, 일본에서 한 마리 늑대가 들어온다. 그의 목적은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첫 출발로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것. 맞다. 그의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다.

이토 히로부미
긴 어전 회의 끝에 고종과 신하들은 일본이 제시한 강제 조약에 체결 불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스스로 정한 데드라인이라도 있는지 이토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고종은 단 하루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이토와의 독대를 거듭 외면한다.
“짐이 만나주지 않으면 조약은 체결될 수 없을 것이니, 평생이라도 도망 다닐 것이다.”
이에 이토는 고종을 제외한 대신들을 덕수궁 중명전으로 불러 모은다. 고종 1년부터 1910년까지를 기록한 역사 기록물 ‘대한계년사’는 그날의 분위기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총칼이 늘어서 철통과 같았고, 내정부 및 궁중에도 일부 병사가 배치되어 그 공갈의 기세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요? 이토 저 자가 왜 상석에 앉아 있는 것이오?”
“아무래도.... 저 자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작정인 듯하오.”
여덟 명의 대신은 을사늑약 체결의 찬반을 묻는 이토의 물음 앞에 섰다. 참정대신 한규설은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폐하가 찬성했다면 어쩔 수가 없다고 지껄이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이완용이 나섰다. 그는 말로써 이토의 품에 안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의 탓이오. 감정이 상할 일이 아니외다. 일본의 제의를 수용해야 하오.”
이토의 눈길이 이완용에게 닿았고, 나라를 대표한다는 신하 다섯 명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동시에 이완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은 을사오적이 되었다.
을사늑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민심은 들끓었다. 선비를 자처하는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고,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로 을사오적을 꾸짖었다.
“오늘 목 놓아 통곡한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시일야방성대곡
이근택은 집으로 돌아와 목숨을 건졌다고 기뻐하다 종에게 모욕을 당했고, 이지용은 전주 기생 산홍에게 첩 제안을 거절당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 채 살아갔다.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고 첩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시는 게요?”

을사오적 이지용
“뭐야? 이 년이 기생 주제에?”
자신의 집 담벼락에 오물을 투척하는 백성들을 향해 이완용은 궤변을 싸질렀다.

을사오적 이완용
“조약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말이다. 외교에 대한 문제만 잠깐 일본에 맡겨졌으나, 나라가 부강해지면 돌려받으면 된다!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바친 대가로 이완용은 총리대신이 되었고, 이토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 총리대신의 공이 아주 컸소이다데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을 것이오데스. 무지몽매한 백성들이나 다른 대신들의 저항이 클 것이오데스. 내 잘 부탁드리오데스!”
“하이!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이 조선을 일본에 병합시키겠습니다.”
수년간 이토의 수족이 되어 많은 일을 해내던 어느 날 이완용을 충격에 빠트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출처-
(안중근 장군은 브라우닝 M1900 권총에 총 8발의 총알을 장전했고, 이 중 7발을 발사했다.)
“뭐라?!! 지금 뭐라고 했나? 정말로 돌아가신 건가? 범인은 잡혔나?”
“네! 안중근이라는 자입니다.”
이완용은 조문 사절단을 이끌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이토의 시신이 있는 중국 대련으로 달려간 후,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흑흑흑.... 이토 상은 나의 스승이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본인보다 일본 제국주의를 더 사랑한 이완용. 이 천박한 힘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 자기 자신마저 속여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던 이완용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좌천이나 금전적 손실이 아니었다. 실존적 문제였다.
1909년 12월의 어느 날, 명동 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매섭게 노려보는 군밤 장수가 있었다.
‘어서 올라타거라. 네 놈을 황천으로 데려다 줄 인력거다.’
스무 살을 갓 넘긴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군밤 장수로 변장한 채 이완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완용을 태운 인력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재명은 품 안에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인력거가 자신의 앞을 스치는 바로 그 순간 이완용을 향해 칼을 날렸다.

이재명 의사
“받아라! 이 매국노야!”
“억! 누........"
이완용은 칼에 찔리고도 인력거에서 탈출해 거리를 뒤뚱뒤뚱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완용의 얼굴을 알아본 행인들은 누구 하나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
“헉......”
이완용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거리에 다시 쓰러졌다. 이재명 의사가 달아나는 이완용을 쫓아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그는 길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이완용을 바라보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쳤을 행인에게 의외의 말을 건넨다.
“휴...... 그 담배 하나 빌립시다.”
거리의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고, 쓰러진 이완용을 돌보지 않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공범과 배후를 대라는 모진 고문에 이재명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공범? 2천만 우리 동포가 나의 공범이다.”
청년 이재명은 재판장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었듯이 이완용의 죄를 고했다.
”이완용의 죄는 이러니 잘 들어라! 을사늑약을 체결해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고 통감부를 설치케 하였다. 고종 황제를 협박하고 강제로 물러나게 만든 죄 또한 크다. 또한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켜 한일병탄을 추진한 죄가 가장 크다. “
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을 앞둔 청년 이재명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부터 늘 꿈꿔왔던 일이라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이후 감옥에서 시간은 흘러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 지 1개월 만인 1910년 9월 30일, 경성형무소에서 이재명 의사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칼을 세 번이나 맞고도 이완용은 죽지 않았다. 칼을 맞은 즉시 당시 최고 수준의 치료를 받은 덕택이었다. (하지만 이때 입은 상처로 인해 이완용은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녔다. 1926년에도 결국 이 폐렴으로 인해 사망하게 된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을 때,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직 안 됩니다. 지금 움직이시면 곤란합니다.”
“무슨 소리. 지금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다. 실로 역사적인 날이 될 것이다. 이런 날 내가 빠지면 안 되지. 크하핫~!”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날이었다. 이완용은 상처를 부여잡고 통감부로 달려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나라의 국권을 팔아넘기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한일 강제 병합 후
황족과 대한제국 친일 대신들이
덕수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강제로 체결된 이 한일병합조약의 1조는 다음과 같다.
「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이완용은 이 조약이 더욱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민이 일본어를 반드시 배워야 하며, 이순신전을 금서로 정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조선 총독부에서는 그를 불세출의 인인이며 동양의 인걸이라고 치켜세웠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1919년이 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3.1 운동이다.
일제는 한민족의 3.1 운동에 놀랐다. 이때 이완용은 다시 한번 조선인들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 말을 수차례 뱉어댔다.
“명심해라. 이 무지몽매한 것들아! 시위라는 건 꼭 힘없는 것들이 한다. 치열한 국제 경쟁 시대에 조선의 독립은 허망한 것이다!”
조선인들은 이완용을 개라고 불렸으며, 시위대가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완용 자신도 그 민심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에 대한 증오를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삶에 대한 후회와 미련만 남는다는 임종 직전에도 그는 흔들림 없는 신념을 보였다.
“힘없는 다리를 부축해 달라고 남에게 부탁한 것이 어떻게 나라를 팔아먹은 일이라고 매도당해야 하느냐? 나의 자식들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가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제는 미국이 대세다. 그러니 영어를 익혀서 친미가 되어야 한다. 내 말을 들으면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 나! 이완용이다.”
1926년 일제의 비호 아래 이완용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천 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갔으나 속 빈 강정이요. 진심 없는 조문이었으며, 진정한 종말의 시작이었다.

1926년 신년에 찍은 이완용의 마지막 사진

용산역 광장 영결식장에서 칙사가 분향하고 있다.
아래 동그라미에 담긴 사진은 이완용의 관을 안치하는 모습이다.
1926년 2월 13일, 동아일보는 이완용의 죽음 위에 저주의 사설을 꽂는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부터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 자 동아일보
이완용은 조선이 해방되면, 자신의 무덤이 훼손될 것이 자명한 일이라는 것쯤은 아는 영민한 자였다. 그래서 팔도의 명당 여섯 곳에 허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말이다. 아직 독립되지 않은 일제 강점기였음에도 그의 묘에는 오줌이 내리고, 돌이 던져졌으며, 저주가 담긴 칼이 꽂혔다.
1979년, 이완용의 후손 이석형이 인부 열 명과 함께 묘를 찾았다.
“아이고야. 이게 묘지가 꼴이 말이 아니네. 명당이면 뭐 하나. 돌보는 후손이 없는데.”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의
선인봉 중턱에 있던 이완용의 묘
이완용의 묘는 관리가 되지 않아 찾기도 어려웠고, 무덤 안의 관은 누군가의 저주를 받은 듯 아카사이 뿌리가 촘촘히 감고 있었다.
“어떡하실 작정이슈?”
“화장해서 인근 하천에 뿌려 주십시오. 족보에서도 이미 지워진 사람입니다. 뼈조차도 남겨 두고 싶지 않습니다.”
천하제일의 명당도 이완용의 뿌리 깊은 악행을 덮어주진 못했다. 이완용의 관 뚜껑은 한 대학의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나, 이마저도 지켜보기 힘들었던 역사학자가 있었다.
“내가 사고 싶소. 얼마면 되겠소?”
“어디다 쓰시려고?”
“태워버리려고 합니다.”
이완용은 자신과 일제강점기의 영원을 믿었을까.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이 되어 독립하고 세계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의 상황을 상상이나 했었을까.
광복을 맞이하고 부강해진 나라에서 당시 그가 비웃던 독립운동가들은 영원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조국과 민족을 팔아먹은 대가로 살아생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그는 70년도 살지 못한 현생에 지은 죄로 인해 불멸의 증오를 받게 되었다.
필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한국 역사에서 기묘하거나
비주류 이야기를 묶어 낸 책이라고!
역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으로
이해해 보고 싶은 독자께 권한다.
당신의 예감이 맞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말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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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는 나이에
전업 작가가 되겠다며
회사를 때려치고 나온
슈퍼팩토리공장장.
이후 각종 글을 쓰며 발버둥 치던 그가,
드디어 방송까지 진출했다.
유튜브 및 IPTV인 Btv에서 방송되는
<역사썰명회>라는 방송이다.
중간중간 재연(?!)도 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는
댓글이라도 남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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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임권산
마빡 디자인 : 정인영
기사 : 슈퍼팩토리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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