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무해한 관계

2025-02-07

‘무해력’이란 말을 최근 듣게 됐다. 처음에는 ‘문해력’을 잘못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해를 끼치지 않으며 작고 귀엽거나 순한 존재가 지닌 강력한 힘’을 의미하는 신조어였다. 어린 판다 푸바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것이나 편안한 풍경의 숲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 등이 무해력이 무엇인지 잘 말해 준다. 이렇게 귀여운 동물이나 평온한 자연 등 단순하고 순수한 것이 힘을 발휘함에 따라, 이른바 무해력을 갖춘 제품이나 서비스가 시장에서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동안 충격적으로 강한 매운맛과 조언을 가장한 독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송물이 유행했던 것을 생각하면 순하고 안전한 것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다.

MZ선 해롭지 않은 관계 추구

무례·민폐 피하려다 관계단절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심리 탓

적절 실례 속 진정한 관계 싹터

무해는 해롭지 않다는 것이니 분명히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무해한 화장품, 무해한 장난감, 무해한 콘텐트, 무해한 먹거리 등등. 최근에는 무해한 인간관계까지 자주 이야기된다. 특히 MZ세대로 일컬어지는 젊은 층 사이에서는 해롭지 않은 관계의 추구가 일종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직장 동료 등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형태의 유해함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무해한 관계가 제시된다.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사생활에 대한 침해나 무례한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 그리하여 감정적 상처를 덜 주고 덜 받는 것으로 인간관계에서의 무해함을 정의한다. 무해한 인간관계를 위해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분명히 지키고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남에게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무례한 사람은 빠르게 ‘손절’할 것을 권한다.

원치 않는 관심과 선을 넘는 관계는 피곤하다. 친척의 질문 공세는 명절을 불편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고 퇴근 후 휴식을 방해하는 직장 상사의 문자는 민폐의 대명사다. 당연히 무례하지 않은 사람과 폐가 되지 않는 관계를 찾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해한 관계의 추구는 무례와 민폐를 피하는 선을 훨씬 넘어선다.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상대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하며 타인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내 속마음은 끝까지 감춰야 한다.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유해성 관계를 막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것이 필요하다. 무해한 사회생활을 유지하려면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직장에서 호구가 되지 않는 방법 또한 숙지해야 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무해한 관계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해함을 추구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은 하나같이 인간관계의 단절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에 관한 관심을 차단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깊이 있는 대화를 피해 언제든 이별할 준비가 돼 있는 관계다. 이를 진정한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러한 관계는 여행길에 우연히 만나 잠시 말을 섞는 사람과의 사이 같은 것일 뿐이다. 완전히 무해하다는 것은 사실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상대에 대한 자기 고백이 깊어지고 넓어질수록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진다는 것은 학문적 이론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현대인들이, 특히 젊은 층이 무해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상처받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조나단 헤이트에 따르면, 이러한 두려움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과잉보호와 놀이 기회의 박탈이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다. 재미는 모험에서 나오며 모험은 위험을 수반한다. 상처받기 싫어 모험을 회피하면 놀이에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부모 등에 늘 업혀 다니는 아이는 절대 넘어질 일이 없겠지만 결코 걸음마를 뗄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적당한 실례』라는 책이 출간됐다. 작가는 무해한 관계를 위해 출신 지역과 학교, 결혼 여부 등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을 모두 피하다 보니 “이 쿠키 좋아하세요”와 같은 피상적인 것만 남았다고 아쉬워했다. 사람의 행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깊은 인간관계를 위해선 적당한 실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례를 피하고자 말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적절한 선에서 실례하며 진정한 관계를 쌓아나가는 2025년이 됐으면 한다.

이재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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