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안보 對 인권’ 확 달랐던 정책… 이젠 보수도 진보도 “성장” [심층기획-2025 대선 매니페스토-내일을 바꾸는 약속]

2025-05-12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 후보 공약 분석

옅어지는 정당 간 정책공약 차별성

20대 대선 보수·진보 모두 “복지” 목청

이번에도 일제히 “기업지원·신산업 육성”

“유권자 정책 비슷하면 다른 요인에 의존

공약 보고 판단하는 합리적 투표 어려워”

재정대책 없는 ‘묻지마 공약’ 고질병

대선 공약은 소요예산 추계할 의무 없어

‘보여주기식’ 단기적·선심성 약속들 판쳐

인프라·구조 개혁 등 장기 과제는 소홀

전문가 “지속가능 공약 검증체계 필요”

1987년 민주화 이후 치뤄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주요 대선 후보들의 10대 공약은 ‘경제·산업’ 관련 정책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관련성을 비중으로 집계했을 때 경제 정책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 압도적인 수치로 나타났다.

제21대 대선 공약의 경우 경제·산업 정책 대부분이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와 같은 인센티브 정책이 주를 이뤘다. 이번 대선 주요 후보들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 모두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를 1호 공약의 주요 카테고리로 내세웠다.

◆공약도 시대 따라 변해왔다… “민주·인권→복지·노동→경제 성장·민주주의”

13∼20대 각 대선에서 15% 이상 득표한 주요 대선 후보들(21명)의 10대 공약을 전수 분석한 결과, 주요 대선 후보의 공약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크게 바뀌어 온 것으로 드러났다.

큰 흐름은 1980∼1990년대에는 거대한 민주화의 흐름 속에 ‘민주·인권’이나 ‘정치·행정’ 분야 공약이 주를 이루었고, 높은 경제 성장에 따른 경제 불평등이 심화하면서 2010년대 이후로는 ‘복지 확대’와 ‘노동권 강화’ 등의 정책이 크게 늘어났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모두 코로나19 극복과 소상공인 지원을 내세우는 등 여야를 막론하고 ‘복지 확대’가 공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어려운 경제 상황 및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면서 21대 대선에선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가 동시에 강조되고 있다. 민주당 이 후보는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강화를 핵심으로 10대 공약을 내세웠다. 인공지능(AI)과 신산업 육성을 통한 ‘세계를 선도하는 경제 강국’ 공약은 경제 성장(63.83%)에 가장 높은 비중을 두었으며, 민주주의와 국민 통합을 강조한 공약에서도 민주주의(94.25%)가 압도적 비율로 나타났다. 이는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 강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 반영된 결과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정책 공약에서는 복지 확대가 6회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으며, 기업 지원 및 규제완화와 평등 증진 관련 정책도 높은 빈도로 나타났다. 그다음으로는 경제 성장, 시장 규제, 기술 및 인프라 분야 순으로 빈도가 높았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정책 공약은 경제·산업 분야의 기업 지원 및 규제완화와 복지·삶의질 분야의 복지 확대가 5회로 가장 많이 언급됐다. 이준석 후보의 정부 및 행정 효율성은 그다음 높은 빈도로 나타났다.

◆주요 정당 간 공약 차별성은 희미해져

주요 정당 간 정책 차별성이 희미해지는 것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1980∼1990년대만 해도 보수 정당은 ‘경제 성장’과 ‘국가안보’를, 진보 정당은 ‘민주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주요 정당 간 차이가 줄면서, 제20대 대선에서는 여야 모두 ‘복지 확대’를 주장했다. 특히 이번 대선에는 주요 정당들이 ‘기업 지원 및 규제 완화’를 최우선 공약으로 일제히 내세우고 있다.

김진주 선거연수원 지정교수는 보수·진보 간 차별성이 줄어드는 경향에 대해 “1980∼1990년대에는 민주화 이후 선거 역사가 길지 않았던 상황에서 각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이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후보 간 정책 차별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김진주 교수는 “정책 차별성이 희미해지면 유권자들은 정치적 차이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이는 정책을 기반으로 한 투표 결정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유권자들은 다른 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고 우려하면서 “공약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별성이 있어야 유권자가 실질적인 차이를 인지해야 합리적인 투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원마련 대책 미흡은 여전한 고질병

주요 후보들은 다양한 경제활성화 대책이나 복지 확대를 약속하면서도 이를 뒷받침할 재원 마련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고질병은 수많은 선거에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21대 대선 후보들 역시 경제활성화를 강조하지만, 대부분이 ‘인센티브를 준다’, ‘지원한다’는 식의 혜택 공약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공약에 대한 예산 추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이같은 공약 남발에 대한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국가재정법 제4조에 따르면 모든 법안에는 비용추계서를 첨부하게 되어 있지만, 대선 공약에는 이러한 의무가 없다. 박범섭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제 공약에 다양한 지원금을 늘리고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하는데 재원 계획이 없다면 그것은 포퓰리스트”라며 “대통령이 되려면 공약을 실천할 재원부터 구체적인 계획을 유권자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재정적 지원을 내놓는 공약은 가장 즉각적이고 눈에 띄며, 유권자에게 ‘보여주기’ 좋은 정책이다. 김은경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러한 선심성 공약이 더 강해진 현상에 대해 “5년이라는 짧은 임기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구조를 개선하거나 인프라를 바꾸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어렵다. 반면, 지원사업이나 현금 지원 같은 공약은 금액을 명시하고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은경 교수는 국민의 장기적 이익을 고려한 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공약 검증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 교수는 “공약을 이행했다고 보는 기준 자체가 단기적 성과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했다. 매니페스토 운동의 본래 목적이 공약 이행을 모니터링하는 데 있었다면, 이제는 공약의 유형에 따라 달성 기준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인 현금 지원 정책과 달리, 구조적 개선이나 인프라 확충처럼 장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공약은 달성도를 평가할 때도 긴 안목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권자들의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김은경 교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성과나 현금 지원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사회 전반에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를 가져올 정책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석에 도움 주신 분들>

고아침 사회적협동조합 빠띠 공익데이터 부문 활동가, 김장환 프리랜서 개발자, 김장현 성균관대 인공지능융합학과 교수, 임승건 AI 데이터과학자, 폴라 레만 독일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 박사

공동기획 : 한국정당학회

매니페스토취재팀=조병욱·장민주·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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