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종착점일 뿐이다

2025-03-24

정치인의 말이 아니라 그의 속내를 몽땅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제1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김보영 작가의 SF소설 ‘고요한 시대’는 이런 착상에서 출발한다.

소설은 ‘마인드넷’이라는 가상공간이 등장한 근미래의 한국 정치를 다룬다. 마인드넷에 접속하면 자신의 생각과 감각이 시각화돼 다른 이들에게 공유되는데 유일하게 이를 통해 속내를 전부 드러내는 대선 주자, 그리고 기존의 언어로 그를 무너뜨릴 프레임을 고안하는 인지언어학자가 나온다. 총체를 풀어놓은 후보와 거대한 정치 언어의 산이 대결하는 양상이다. 생각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언어, 그 언어를 통한 정치 과정이 종착점에 다다른 게 아니냐는 문제의식이 깔렸다.

언어를 통한 정치가 무너지는 소설 속 과정을 보며 어쩔 수 없이 윤석열 대통령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그만큼 섬세한 정치 언어를 요구받은 정치인도 드물었다. 역대 최소 격차인 0.73%포인트 차 대선 승리, 여소야대 국회, 낮은 국정 지지율이라는 취약한 토대를 극복할 유일하고도 합당한 길은 정밀한 정치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번번이 길을 벗어났다. 통합과 위무 대신 ‘반국가세력’과 ‘딱딱 책임론’ 같은 신조어를 띄웠다. 연설에 통합이 얼마나 등장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행동이라고, 지지율보다 중요한 건 민생이라고 했지만 행동 역시 탈선이었다.

12·3 비상계엄은 언어를 통한 정치의 종말 선언 그 자체였다. 이미 포기한 대통령의 정치를 자폭 수준으로 포기하고, 이미 오염된 대통령의 말을 심리적 내전의 발화점 수준으로 몰고 갔다. 야당발 탄압 프레임을 주장하며 쓴 ‘호수 위 달그림자’와 ‘계몽령’이라는 말은 오염된 정치 언어의 최종판이다. 이에 부응한 여권 일부 정치인들은 혼란을 부추기고 정치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근미래 그리고 좀 더 지난 미래에 윤석열 시대를 기록할 때, 여권은 민주주의와 정치 언어를 종착점으로 끌고 가려 한 세력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윤석열 시대 이후의 해법으로 마인드넷을 소망해볼 수 있을까. 불가능한 것은 차치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아 보인다. 섬세한 언어로 상대를 설득하고 이견을 조율해 정치의 공간을 여는 것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정치의 핵심으로 남을 것이다. 본인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낱낱이 공개해도 결점이 없을 ‘초인’을 기다리고 싶지도 않다. 다만 혼란의 겨울을 지나며 시민들과 계약을 맺은 대리인의 한계를 인지하고 헌법과 합리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의 가치가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데 주목한다. 정치인들을 강제하는 시민들의 압력을 강화하는 고된 과정이 ‘윤석열 이후’를 지배하는 언어가 되기를 바란다.

소설 속에서 오염된 정치 언어를 이긴 정치인의 심상은 눈 내리는 시골 기차역 앞 벤치에서 홀로 산허리를 바라보는 정결한 이미지로 나타났다. 탄핵심판 선고를 기다리는 윤 대통령의 심상은 경로를 이탈해 폭주하는 기차일 것 같다. 탈선한 기차도 곧 종착점에 다다른다. 그가 모두를 끌어다놓은 이 기점에서 정치와 언어의 선로는 이어져야 한다. 진창이 된 정치 언어들의 시간 속에서도 건져올릴 만한 말들을 기다린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