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당시 휴대전화 끄고 국회로 향해
친위 쿠데타 실패, 민주화운동의 성과
계엄 옹호 세력 국회 못 들어오게 해야
서부지법 난동 사태 옹호 정치인 존재
정당 스스로 폭력 수단화해선 안 돼
12·3사태로 대통령 중임제 필요성 대두
권력 안정성 등 위해 권력구조 개편을
“자려고 누웠는데, 보좌관으로부터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무슨 소리냐’며 끊고 나서 몇 초 누웠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죠. 군부 독재정권 시절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날의 공포 세포가 되살아나고 온몸에 쫙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습니다.”
이학영 국회부의장(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 관련 소식을 접했을 당시를 떠올리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는 학창 시절 ‘5·16장학금’을 받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던 청년이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안정적인 직업을 꿈꾸며 공무원을 지향했지만,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던 그가 1974년, 전남대 문과대 학생회장을 떠맡듯이 했다가 연루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용공조작 사건으로 불법 체포돼 고문을 당한 경험은, 그를 시민사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 부의장의 삶의 궤도를 바꾼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그로 하여금 고문실에서의 지옥 같은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는 “계엄군에게 붙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곧장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자신이 실제로 계엄군 체포 대상 명단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세계일보는 지난 18일, 이 부의장을 국회에서 만나 이번 계엄 사태와 그에 이은 대통령 탄핵 정국, 심화되는 진영 갈등의 해법과 개헌론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계엄 이후 어느덧 3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장했고 문화적으로도 자존심이 얼마나 높아졌나.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2·3은 온 국민이 자부심을 느끼던 그 순간 정말 수치스러운 계엄령에 의해 이뤄진 친위 쿠데타 시도였다.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이다. 우리는 저력 있는 국가이니 빨리 시스템을 회복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계엄 당시 직접 겪은 일을 설명해 달라.
“일단 무작정 밤길을 걸었다. 군인들이 위치추적을 할 것으로 판단돼 휴대전화 전원도 껐다. 영화 ‘서울의봄’이 떠오르더라. 이후 차를 타고 국회로 가면서도 ‘곧장 붙잡혀 구속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지’ 싶었다. 그런데 경찰이 국회의원을 국회로 못 들어가게 하고 있더라. 인적 드문 곳에서 담을 넘어 경내로 들어왔다. 그때 마포 쪽에서 군 헬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본회의장으로 달려가며 ‘내 생에 이런 날이 또 오는구나’ 했다. 도착하니 (계엄 해제 의결 정족수인) 150명이 모이기 전이었다. 그날 계엄은 독재 때보다 100배 두려웠다.”
―계엄 해제 표결에 국민의힘 의원 상당수가 불참했다.
“군인들이 총 들고 국회에 왔다는데도, 의결을 빨리해야 한다는데도 안 왔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 그런 면에서 소속 의원들에게 표결 참여를 독려한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 김상욱 의원을 높이 치하한다. 이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런 사람들로 국회가 채워져야 한다. 우리는 정당정치로 발전해 온 선진국이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있다. ‘총 들고 권력을 빼앗아야지’ 하는 후진 나라가 아니다. 만약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군대를 국회로 불렀다면 민주당은 ‘우리 대통령이니 봐주자’고 못한다. 계엄을 옹호하는 사람은 국회에 못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번 계기로 드러난 제도상 허점이 있다면.
“윤 대통령은 그간 대한민국 관료로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역사에 대한 자부심도 없고, 역사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우리나라의 관료시스템, 교육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아닌가 우려된다. 적어도 대한민국 유수의 대학을 나와 교육받았고 관료생활을 했다면 국민에 대한 공복의식과 책임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대통령 직책을 개인의 권력으로 봤다. 이것이 시스템의 큰 허점이다. 이런 지도자가 또 없지 말라는 법이 있겠나.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런 사고의 흔적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생각한 국민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윤 대통령의 잘못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향후 새 정부가 구성된다면 사회 각계가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일제히 자기점검을 해야 할 것 같다. 대개 권력자의 친위 쿠데타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계엄은 달랐다. 친위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것은 지난 40년간 이어진 민주화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다. 특히 영관급 군인들이 계엄 때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이 국회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사실이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우리 민주주의 발전의 대단한 성과다.”

―극심한 진영 갈등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민주화 이후 ‘힘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말에 의한 정치’로 넘어왔다. 그런데 지금 선을 넘을 듯 말듯 위험한 수준에 와 있다. 정치세력들이 정말 자제해야 한다. 폭력성이 보이면 단호하게 규제해야 한다. 정당 스스로 폭력을 수단화해서도 안 되지만, 폭력을 옹호하거나 촉발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정치권이 폭력에 대한 경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특히 서울서부지법 난동 사태를 옹호하거나 격려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있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계엄 사태를 계기로 개헌론이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고 국민의 욕구도 다변화했다. 이를테면 5·18정신이나 기후위기 대응 관련 내용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것도 하나의 요구다. 인권 보호에 대한 요구도 많아졌다. 국민 기본권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자산 양극화 심화로 인한 경제적 차별 완화 노력도 개헌으로 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는 ‘다음’이 없기 때문에 뒤를 안 보고 얼마든지 일을 저지를 수 있다. 4년 중임제가 도입된다면 다음에 또 당선되기 위해서라도 조심스럽게 경청할 것이다. 권력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위한 권력구조 개편을 해야 한다.”

―계엄 이후로도 여야 지지율이 엇비슷한 이유를 진단한다면.
“민주당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국민의 눈에 그렇게 안 보인 게 아닌가 싶다. 더욱 진솔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번 계엄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보다 1000배는 더 큰 일이었다. 집안에 다이너마이트를 갖다놓고 불을 붙이려다가 실제 붙이진 않았으니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런데도 여권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다는 게 놀랍다. 민주당이 아무리 미워도 쿠데타까지 해서 소멸시킬 당은 아니지 않은가.”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지적되고 있다.
“조기 대선이 시작되면 민주당의 후보는 이 대표밖에 없다. 이 대표를 중심으로 총선도 치렀고, 현재 가장 지지도가 높은 사람이 이 대표이기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당을 운영할 수밖에 없다. 이 대표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선거는 현실이다. 지지도 낮은 사람을 데려다 억지로 끌어올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 대표를 믿고 선거를 치러야 한다. 중도층을 아우를 수 있는 정책과 비전을 갖추고 세력을 모아야 한다. 민주당이 욕심을 버리고 다수 연합으로서 선거를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소망이다.”

―계엄을 극복한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대한민국은 피눈물 속에 세워진 나라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나. 못 먹고 못 입으며 자식들을 가르치고 10대 경제대국을 만든 것은 인류 역사에 남을 일이다. 이런 나라의 정치인들이 싸워서 나라를 분열시키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를 두고 서로 토론하고 의결하면 다수결에 승복해야 한다.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무너지면 다시는 정상국가로 돌아갈 수 없다. 국민들이 정치권을 잘 이끌어줘야 한다. 저희도 잘하겠다.”
대담=이천종 정치부장, 정리=배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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