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신문기사 가운데 한겨레신문의 국민의힘 김상욱 의원 인터뷰, 중앙일보에도 실렸던 서울대 의대 교수 4명의 성명서 발표 기사가 인상적이었다. 뉴스 과잉, 탄핵 장기화에 따른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격렬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줘서다.
김 의원은 요즘도 하루 200~300통씩 항의 전화를 받는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대통령 탄핵 찬성표를 던진 데 그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어서다. 가령 그는 지난달 소속 정당이 보수 기독교 단체의 탄핵 반대 광주 집회를 홍보하는 카드뉴스를 제작했다며 광주를 사과 방문했다. 당론과 너무 다른 행보 아니냐는 지적에 당론과는 반대지만 헌정 질서와 법치주의를 지키는 게 핵심인 당헌에는 맞는 행동이라고 답했다. 속은 “문드러진다”고 했다. 지역구 울산에서 김상욱 후원자는 사업을 못 할 정도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그만둔다면 돌아갈 “사회적 기반도 붕괴됐다”고도 했다.
계엄 이후 헌법에 관심 갖지만
공화주의 사상의 내용 낯설어해
법의 지배·공익 우선이 공화주의
의정 갈등에 대한 서울대 교수들의 성명서는 표면적으로는 후배들의 수업 거부를 종용하는 건국대 의대 본과 3학년생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의대생 전체 혹은 의료계 전반에 만연한 듯한 특권의식을 꼬집었다고 본다. 동어반복일 정도지만 의대생 정원의 60%, 2000명을 지난해 한꺼번에 늘리겠다고 한 건 무지막지했다. 연세대 의대, 서울대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한 원로 시인 마종기씨는 “한마디로 의사 쪽 의견이 옳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일반 대학이야 강의실 늘리고 마이크 준비하면 되지만, 의대 교육은 당장 해부용 시신을 추가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의사가 경제적 보상이 확실한 직종이라는 사실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당장 의대 증원 여파로 지난해 사교육 시장에서 ‘초등생 의대반’이 급증했다지 않는가. 하루하루가 고달픈 비전문직들은 의사가 힘들다지만 배부른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어쨌든 그 숫자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에 맞서 1년 넘게 협상 테이블을 외면하는 의료인들에 대한 시선이 갈수록 싸늘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때인 2020년 의대 정원을 400명 늘리겠다고 할 때도 의료인들이 협상에 나섰는데 말이다.
보수 정당의 극우화와 의정 갈등. 이질적인 두 문제를 공화주의라는 키워드로 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할 듯하다. 지난해 계엄 이후 헌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무런 설명 없이 왼쪽 페이지에는 헌법 전문(前文)부터 본문·부칙까지 순서대로 인쇄하고 오른쪽 페이지는 비워둬 베껴 쓰도록 한 헌법 필사 책들이 두어 권 출간됐다. 나름 팔렸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깐깐하게 추궁하면, 1조 1항부터 막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는 알겠는데 공화는 도대체 뭔가. 독일에서 공부한 이화여대 정외과 김경희 교수가 2006년 번역한 미국 프린스턴 대학 모리치오 비롤리 명예교수의 『공화주의』(인간사랑), 김 교수가 익숙한 듯 낯선 이 서양 정치사상을 2009년 알기 쉽게 풀어쓴 『공화주의』(책세상)를 마주쳤다.
벼락치기 공부를 요점 정리하면, 공화주의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를 지배하려는 주인이다. 주인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결국 변질되기 때문이다. 결국 추구하는 건 진정한 자유. 정의로운 주인을 갖는 게 아니라 어떤 주인도 갖지 않는, 주인에게 예종(隷從)되지 않은 상태가 진정한 자유다. 지배자의 자의적인 지배에서 보호받으려면 법의 지배(rule of law)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공화국에서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그런 정체(政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속적 삶에서 오는 의기소침을 극복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인간 사회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모두에게, 공공(公共)에 이익이 되는 것을 사익보다 우선하는 희생정신으로 무장하고 말이다. 갈등 조정을 위한 토론은 강조된다. 그래야 모두가 화합하는 공화(共和)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공화주의 잣대를 들이대면, 대통령의 계엄 시도와 이후 여당의 극우화 경향은 법의 지배에 반하는 처사다. 김선택 고려대 명예교수는 “차츰 밝혀지겠지만 비상계엄에 관련된 많은 사람에게서 공화주의 정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의정갈등의 한 축인 의료인들이 협상을 거부한다면 역시 공화 정신의 부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 정신의 부재가 아니라 공화주의 철학의 빈곤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