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다잉메시지
‘정인이법’ ‘민식이법’…. 학대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이름을 딴 법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일사천리로 없는 법까지 만들지만 대부분 아동은 왜, 어떻게 사망했는지 검토하지 않은 채 사망 처리된다. 반면에 미국·영국·일본은 일찍 아동사망검토제(CDR)를 도입해 재발을 막을 예방책을 찾는다. 중앙일보는 3048명의 아이들이 남긴 ‘다잉메시지’를 통해 어른이 관심과 주의를 조금 더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을 심층 취재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아동사망검토진(양경무·김희송·정규희·최인석, 이하 연구진)이 2021년 ‘국과수 아동사망검토시스템(NFS-CDRS)’을 개발한 건 아동학대 사망 인원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김희송 법의검사과 실장은 “과연 아동학대 사망이 이렇게 적을까하는 의문에서 연구가 출발했다”고 말했다.
‘위기 가정’ 전형적 아동 사망 더 주목해야
이들은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신체적 폭력으로 인한 사망 사건보다 방임·방치 같은 전형적인 위기 가정에서의 아동 사망에 더 주목하고, 면밀한 연구·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규희 연구원은 “아동고문 유형의 잔혹한 사건도 매년 10건 안팎 벌어지지만 대다수 아동 사망 사건은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 가정에서 발생한다”라며 “제때 도움을 줬으면 살릴 수 있던 아이가 못 해도 한 해에 100명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알고리즘을 활용하면 인간의 직관보다 더 사실에 근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김 실장은 “최근 부모가 대기업에 다니는 등 소득 수준이 높고 조부모도 양육에 도움을 주는 좋은 환경의 가정에서 아이의 두개골이 손상된 경우가 있었다”며 “데이터 코딩을 해보니 학대 가능성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찰 수사 결과 과정에서 부부가 당시 상황을 숨기려 한 정황 등이 드러났다고 한다.
데이터가 말한 ‘정인이’ 생존 신호
때로는 ‘편견을 피해야 한다는 편견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정 연구원은 “계부모 가정에서의 학대 발생 확률이 데이터상 높지 않지만 대신 학대가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심각한 아동고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 신호를 놓친 대표적인 사례가 2020년 10월 발생한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정인이 사건)”이라고 짚었다.
다만 NFS-CDRS가 미혼모나 정신질환자,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이와 관련해 정 연구원은 “가장 큰 고민거리”라면서도 “결국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가 중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희송 실장은 NFS-CDRS를 아동학대 처벌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엔 선을 그었다. 김 실장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미래에 범죄를 저지를 거란 식으로 해석하면 위험할 수 있다”며“아이 부모에게 위험 요인과 예방책을 알려주는 따듯한 개입의 도구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연간 30여명의 아동을 부검한 양경무 국과수 서울연구소장은 “그간 의사인데 아이들 부검만 하고 살리는 데는 하나도 기여 못 했다는 자책이 컸다”며 “24년간의 지식과 경험이 예방을 위한 연구에 도움이 돼 한결 가벼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과수를 넘어 모든 아동 사망을 검토해야 한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아이 많이 낳으라고만 할 게 아니라 있는 아이를 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