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수업 시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고려 말 왜구가 아지발도라는 소년 장수를 앞세워 쳐들어왔다. 아지발도는 얼마나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던지 고려군이 크게 밀렸다. 그는 온몸을 갑옷과 투구로 감싸고 있어 칼이나 활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멀리서 활을 쏘아 투구를 맞춰 벗겨냈다. 그 틈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쏘아 맞췄다. 아지발도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고, 지금도 바위가 피로 물들어 붉은색을 띈다. 그래서 피바위라고 불린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지요.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황산대첩비와 피바위에 관한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활을 쏘아 그렇게 정확히 맞출 수 있나’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걸 보면 왜구를 물리친 무용담이 재미있었던 건 분명합니다.
전주로 유학을 갔던 고등학교 시절, 어느 가을 경기전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왜 그리도 크고, 왜 그리도 노란색을 가졌는지. 지금은 한옥마을과 함께 한 해 1,5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곳에 불과했지요.
서울에는 정동(貞洞)과 정릉동(貞陵洞)이 있습니다. 비슷한 이름이지요. 이름이 비슷한 건 유래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성계의 본부인은 청주 한씨였습니다. 태종 이방원 등 8남매를 낳은 신의왕후이지요. 그런데 이성계가 본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부인을 맞이했습니다. 바로 신덕왕후 강씨이지요. 신의왕후는 조선이 개국하기 약 1년 전에 사망해 개성에 묻혔습니다. 따라서 개국 당시에는 신덕왕후가 왕비였지요. 태조는 신덕왕후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덕분에 신덕왕후 소생인 여덟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지요. 왕자의 난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조선의 법도에 의하면 도성 안에는 묘지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신덕왕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를 무시했지요. 경복궁에서 보이는 지금의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부근 언덕에 신덕왕후의 능을 조성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사랑꾼’인 셈이지요.
문제는 태조 사후에 일어났습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통해 태종이 된 후 신덕왕후의 능을 현재의 정릉동 자리로 옮긴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능의 석물들을 파내어 청계천 광통교를 지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실상 왕후의 능을 밟고 다니게 된 것이지요. 태종의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이런 연유로 서울에는 두 개의 정릉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장을 하다 보니 ‘릉’이 없어져 먼저의 정릉동에서 ‘릉’자 하나를 뺀 것이지요.
그렇다면 태조는 사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의 구리에 있는 동구릉에 묻혔는데, 바로 건원릉입니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다른 점이 있지요. 봉분이 잔디로 덮힌 다른 능과는 달리 억새로 덮여 있습니다. 태조는 조상들이 있는 함흥에 묻어달라 유언했지요. 하지만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왕릉을 조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책으로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두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이 있었지요, 열네 명의 자녀도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후에는 곁에 누가 남았을까요.
정릉과 동구릉을 걸으며 생각합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양중진 변호사는 대전지검 공주지청장, 춘천지검 강릉지청장, 수원지검 제1차장 등을 거쳐 마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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