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여인들

2025-03-12

카를 마르크스(1818~1883·사진)의 옆집에는 베스트팔렌 백작이라는 귀족이 살았다. 그는 어린 마르크스의 손을 잡고 그리스 신화를 들려주며 숲속을 거닐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에피쿠로스 연구’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인이 되면서 마르크스는 백작의 딸이자 4년 연상인 예니를 사랑하게 됐다. 그러나 백작은 마르크스를 장래성 있는 수재로 평가하면서도 그가 사윗감이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 여겼다. 결국 마르크스와 예니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으로 도망쳐 부부가 됐다.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서 인류에 남을 대작을 꿈꾸며 글을 썼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천하에 악필이어서 본인과 아내, 그리고 평생의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만 알아볼 수 있었다. 결국 비서 겸 보모로 데무스라는 여인을 고용했다. 미모는 아니었지만, 지성미 있는 여인이었다. 아내가 장모 장례식에 참석하러 귀국한 사이에 마르크스와 데무스 사이에 ‘사고’가 일어났다.

데무스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며 마르크스의 아내와 엥겔스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 좀 성장하자 엥겔스가 데려다 키웠다. 예니의 불편한 심중을 고려해서였다. 여자의 육감이 있는데 영민한 예니가 왜 눈치를 채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평생 내색하지 않았고 남편을 추궁하지 않았다.

훗날 예니는 “내 남편이 ‘그만한 일’로 인류 역사에 남을 대작을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쪽지를 남겼다. 아내가 숨지자 꿋꿋하던 마르크스도 슬픔에 젖어 2년의 병고 끝에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세상은 그의 죽음을 알지도 못했다. 엥겔스는 그를 아내 곁에 묻어줬다. 몇 년 뒤 데무스가 숨지자 엥겔스는 마르크스 부부와 합장해줬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마르크스라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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