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세계는 다시 ‘트럼프 시대’를 맞게 됐다. 오는 20일(현지시간) 제4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미국 우선주의’와 ‘힘을 통한 평화’ 기조를 앞세워 세계질서를 재편할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거머쥐고 충성파에 둘러싸인 그는 벌써부터 거침없는 행보를 예고하고 있다. 관세와 군사력 증강을 통한 대중국 견제 수위는 한층 높아지고, 동맹국과는 방위 분담 확대나 무역불균형 시정을 압박하며 마찰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도 ‘트럼프 리스크’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따른 리더십 공백으로 적절한 대처에 차질을 빚게 됐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의 복귀는 미국 대외정책과 국제적 역할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이 돌아왔다’를 기치로 규칙 기반 국제질서와 민주주의 국가 간 연대 등을 중시했다. 반면 트럼프 당선인은 가치나 규범이 아닌, 철저히 미국 이익에 기반해 외교 문제에 접근한다. 1기 때처럼 유엔 등 다자주의 회의체 참여나 기후변화·인권 등 글로벌 협력 의제를 경시하고, 1기보다 더욱 공세적으로 미국의 안보·경제 이익 확장을 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중 전략경쟁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산 수입품에 60% 이상 관세 부과나 멕시코를 통한 우회 수출로 통제, 중국의 최혜국 지위 박탈 등의 공약은 실행 시 디커플링(관계 분리)을 앞당길 수 있다. 외교안보 사령탑인 국가안보보좌관 지명자 마이크 왈츠와 국무장관 지명자 마코 루비오 모두 대중국 매파다. 다만 2기 실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사업과 관련해 중국 내 이해관계가 많아 그의 역할에 관심이 쏠린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군사적 우위 회복을 목표로 해군력 강화 등을 추진할 경우 한국 조선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동맹국을 상대로 거래적 관점에서 국방비 증액과 비용·역할 분담 확대를 요구하는 흐름이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당선인은 ‘안보 무임승차론’ 신봉자다. 최근에는 유럽의 무역불균형과 안보 기여 부족을 이유로 들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를 위협했다. 무역과 안보 문제를 연계해 국방비 지출 확대를 압박하는 전술이다. “관세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라고 누차 언급해 온 그가 경제 문제를 넘어 관세를 미국 정책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무기화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한국의 경우 당장 고민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의 재협상을 미국이 요구할 가능성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한국은 머니머신(현금인출기)”이라며 한국이 바이든 행정부와 타결한 분담금의 약 9배인 100억달러(약 14조5000억원)를 언급했다. 주한미군 감축·철수를 카드로 방위비 인상을 압박하는 것은 물론, 연합훈련이나 전략자산 전개 비용까지 요구할 수도 있다.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를 겨냥해 관세 압박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모든 수입품에 보편관세 10~20%를 부과한다는 공약, 인플레이션감축법(IRA)·반도체법상 보조금에 반대하는 것 역시 한국 기업들에 직격탄이 되는 사안이다.
정상끼리의 톱다운(하향식) 외교를 선호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가장 시급한 현안인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전쟁 해결을 전후해 북한과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추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측근을 북한 담당 특사에 임명하는 것 등을 통해 북·미 대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글로벌 안보·통상 지형을 바꿔놓을 ‘트럼프발’ 지각변동에 각국이 채비에 분주하지만, 한국은 계엄과 탄핵에 따른 정국 불안정으로 시작부터 난관에 처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는 트럼프 당선인과의 조기 정상 회동은 요원하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탄핵소추된 이후 기획재정부 장관인 최상목 권한대행 부총리가 국정 전반과 경제·외교까지 모두 총괄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됐다.
특히 트럼프 2기가 한국 관련 정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밀도 있게 협의하기도 힘들다. 현안 대응에서 뒤처지는 것은 물론, 북한과의 대화 재개 등 미국의 대북 외교 구상과 관련해 ‘한국 패싱’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우선순위나 북·러 군사협력 진전 등 지정학적 변화로 인해 북·미 정상회담이 조기 성사될 전망이 밝지는 않다면서도 대화 재개 시 한국의 역할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했다.
앤드루 여 브루킹스연구소 한국 석좌는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으로 김정은의 셈법이 바뀌었고 이전처럼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나 제재 해제에 간절하지 않다”면서도 “중요한 것은 트럼프의 외교는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며, (대화가)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경우 트럼프는 한국과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트로이 스탠가론 윌슨센터 한국역사·공공정책센터 국장도 “트럼프의 대북정책 검토가 (한국의) 정치 공백 와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 제약이 있다. 트럼프가 북한과의 관여에 나선다면 한국의 안보 우려를 도외시하지 않도록 하는 게 대미 외교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국 불안이 지속되면 트럼프 2기를 상대해야 하는 한국의 외교적 대응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셀레스트 애링턴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수개월 뒤에 정권 교체가 일어날 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 정책결정자들이나 관료들의 입지도 약화될 것”이라며 “트럼프 2기 인사들과의 비공식 회동 주선은 물론 한국 정부 조직이나 정책 계획을 마련하는 데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스탠가론 국장은 “관세 정책 등과 관련해선 한국 기업들이라도 트럼프 측과 직접 접촉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