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범죄” “강제점령 아픔에 공감” 이스라엘 질타한 37개 나라

2025-05-07

“땅과 사람의 관계, 그 땅의 생태적 온전성을 지킬 의무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십시오. 점령국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의 생태를 복구하려는 국제기구를 도와야 한다고 명시해주십시오. 환경 파괴와 대규모 강제 이주는 자결권을 중대하게 해치므로, 이스라엘이 즉각 이를 중단하고 배상 책임을 진다고 선언해 주십시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의 대리인으로 나선 마르게레타 웨베린케 싱 암스테르담대 교수는 지난 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에서 열린 국제사법재판소(ICJ) 5차 청문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인도적 구호를 허용·지원할 의무가 있는지를 가리는 청문 절차에서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국제법적 의무와 점령국 의무를 강조할 때, 바누아투는 ‘생태적 자결권’을 내세워 가자지구의 평화와 회복을 호소했다.

바누아투는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선 나라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고, 불시로 덮치는 지진과 태풍은 바누아투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 왔다. 아놀드 킬 로흐만 바누아트 법무장관은 “우리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바누아투는 환경과 땅, 물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한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존과 직결하는 문제임을 알고 있다”고 했다.

바누아투가 팔레스타인과 연대의 뜻을 밝힌 것도 같은 이유였다. 바누아투의 대리인들은 ICJ 청문회에서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강제이주와 농지 파괴로 팔레스타인인과 땅의 관계가 끊어지고 있으며, 건물·시설물 폭격으로 유해물질과 폐기물이 토양·대기·수질을 오염시킨다고 주장했다. “올리브 나무를 말살하고, 수원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파괴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는 팔레스타인 국민과 후손이 지속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환경을 없애는 ‘생태학적 범죄’”라는 것이다.

바누아투뿐만이 아니다. 지난달 28일 시작된 5일간의 ICJ 청문회에서 39개국 중 37개국은 각자의 이유와 논리로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행태를 비판했다. 이번 청문 절차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 중인 이스라엘이 인도적 지원을 허용·지원할 의무가 있는지, 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의 활동을 금지할 수 있는지를 따지기 위해 열렸다. 이스라엘은 지난 3월2일 이후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모든 긴급구호와 인도적 지원을 차단했다. 이스라엘은 지난해 UNRWA 활동 금지 법안을 통과시키고 지난 1월부터 이를 발효했다.

ICJ 청문 참여국 95%, 아픔과 분노로 팔레스타인 손을 들다

일부 국가는 침탈과 피점령의 상처를 떠올리며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공명하고 연대했다. 강제점령과 식민지배의 상처를 딛고 선 경험, 독립을 위해 오랜 기간 싸워온 기억을 가자지구의 참상에서 떠올린 국가들이다.

아르투르 하라짐 폴란드 외교부 국장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폴란드는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점령으로 참혹함을 겪었다. 우리는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렸다”며 “이러한 경험으로 폴란드는 민간인에 대한 보복 조치와 집단 처벌 금지를 주장해왔다. 이 자리에서도 민간인의 권리와 교전국의 의무를 상기하고자 한다”고 했다. 자국 안보를 이유로 펼치는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도 국제인도법과 제네바 협약 등 국제사회의 합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미비아는 유엔과 UNRWA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백인 정권의 위임통치를 받았던 아픈 역사를 꺼냈다. 나미비아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문제 제기에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권은 나미비아 불법 점령을 끝내지도, 유엔군 주둔을 허용하지도 않았다”며 “(이스라엘·가자지구와의) 유사점은 명확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제사회의 연대와 길고 힘든 투쟁 끝에 나미비아는 승리했다. 국제사회의 일원이자, 국제적 연대의 수혜자로 나미비아는 이번 논의에 참여할 도덕적 의무를 진다”며 이스라엘의 UNRWA 활동 금지와 구호 차단을 “불법점령을 강화하고 팔레스타인 영토를 병합하려는 전략”이라 비판했다.

일부 국가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연루된 UNRWA 직원이 2023년 10월7일 하마스의 공습에 가담했다는 이스라엘 측 주장을 직접 반박했다. 이는 이스라엘이 UNRWA 활동 금지의 명분으로 삼은 의혹이다.

사이드 하이더 샤 주네덜란드 파키스탄 대사는 “UNRWA가 하마스에 의해 ‘침투당했다’는 이스라엘 주장은 터무니없다”며 재판부에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그는 이스라엘 주장의 근거가 ‘신뢰하기 어려운 스크린샷’ 등 허술한 자료에 기반하고 있으며 ‘1462명의 UNRWA 직원이 테러 단체 소속’이라는 과도한 주장 역시 근거가 제출·검증된 바 없다고 했다.

몰디브는 “개별 활동가가 공정성을 위반하더라도 조직 자체가 공정성을 잃는다고 볼 수 없다. 이스라엘 주장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문제 인원은 UNRWA 약 3만명의 5% 미만”이라고 했다. 코모로는 이스라엘의 UNRWA 활동 금지 후 구호 공백을 보완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유엔 기구가 테러리즘을 조장한다’는 이스라엘의 비난은 아무 근거도 없다. 이런 주장은 전 세계 UN 직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했다.

‘전쟁범죄’ ‘집단학살’ 등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는 국가도 다수였다. 튀르키예는 “이스라엘은 굶주림을 무기로 사용한다. 대피 명령 몇 분 만에 수십만명의 실향민을 이곳저곳으로 휩쓸고 다닌다”라며 “이스라엘을 멈출 법과 제약이 없는 곳에서 혼란과 무법, 대량 살해가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모로는 “민간인을 인도적 지원에서 고의로 차단하고, 의도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주거나 신체적 해를 끼치는 것은 전쟁 범죄나 집단학살에 해당할 수 있다”고 했다.

분노는 중동·아프리카에 국한되지 않았다. 노르웨이는 이스라엘의 구호 차단을 “비양심적이고 불법적”이라고 했다. 중국은 “가자지구 아이들의 절박한 눈빛이 우리 양심을 관통하고 있다”며 “국제법은 무력 앞에 굴복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스라엘의 배상 책임도 언급됐다. 콜롬비아는 “점령국은 가능할 때마다 피점령국의 원상회복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불가능할 경우, 점령으로 가해진 피해 배상이 정당화된다”고 했다. 코모로와 바누아투도 이스라엘이 배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을 옹호한 국가는 미국과 헝가리 두 곳이었다. 미국은 구호 차단으로 빚어진 가자지구의 참상을 철저히 외면하는 방식으로 옹호 논리를 폈다. 국제법 조항을 엄격하게 따지면서 ‘이스라엘의 안보 이익’을 강조했다.

조슈아 시먼스 미 국무부 선임 국장은 “제네바 협약 59조에는 ‘모든 외부 기관이 제공하는 구호에 동의해야 한다’는 문구가 없다. 점령국이 어떤 구호 계획에 동의해야 하는지도 정하지 않는다”라며 “점령국은 긴급한 안보상의 이유로 (인도적 구호를) 제한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유엔 회원국에 구속력이 있는 결정은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안보를 이유로 한 이스라엘 구호 차단은 정당하며, UNRWA 배제도 이스라엘의 권한 내의 행위라는 논리였다.

민간인 대상 공습에서 여성과 아동에게 집중된 피해, 적신월사 등 국제구호단체 구조요원을 대상으로 한 살상, 병원·학교·난민캠프 등 교전이 금지된 민간시설에 쏟아진 폭격 등 다른 국가들이 주목한 가자지구의 실상은 한 마디도 거론되지 않았다.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을 옹호해온 나라다.

헝가리는 ICJ의 공정성을 거론하며 ‘정치적 재판’을 문제 삼았다. 헝가리는 “우리는 ICJ의 정치화, 그리고 이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새로운 분열을 만들고 긴장을 고조시킨다고 확신한다”며 “ICJ가 일종의 전장으로 이용될 현실적 우려가 있다”고 했다. 또 “더 넓은 정치적 맥락이 고려돼야 한다”며 ICJ가 이스라엘의 구호 차단에 대한 권고 의견을 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1일 이스라엘·하마스 1단계 휴전이 만료된 후 악화 일로를 걸어온 가자지구의 평화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재점령 계획을 공식화한 데 이어, 인종청소 수위의 강경론을 불사하며 확전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극우 성향의 베잘렐 스모트리히 이스라엘 재무장관은 6일(현지시간) 요르단강 서안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가자지구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며 “(가자지구 주민들이) 하마스나 테러가 없는 남쪽의 인도주의 지역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했다. ICJ의 심리 결과는 수개월 내 판가름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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