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빛바랜 사진

2025-12-09

강대헌의 씨앗 한 톨

바라볼 때마다 쉽사리 눈길을 뗄 수 없는 사진이 있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이다. 엘피판 가운데 동그랗게 오려 붙인 흑백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은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이다.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아빠는 딸이 올려다보는 든든한 존재처럼 보였다. 사진은 아내가 찍었다.

쏜살같이 지나간 세월이 어느새 스무 해 남짓이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였다. 화석의 기록을 몸에 새긴 나뭇잎들이 포장된 도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로 시원하게 뻗은 붉은빛 감도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아름다운 장소였다. 차들은 통행할 수 없고, 오고 간 인적(人跡)만이 댕그라니 남는 곳이었다.

그야말로 아내와 딸과 함께한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한때였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나는 영락없이 번민에 시달리고 만다.

거기가 좋다고 하더라면서 여행을 떠나자고 물꼬를 튼 건 나였으리라. 한 술 더 떠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러겠느냐고 설레발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나를 따라 길을 걷던 딸아이가 종달새 재잘거리듯 건네었던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왜 이리도 어설프게 변해버리고 말았는가. 미안한 마음이 몽글몽글 생겨난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대면한다. 윌리엄 워즈워스가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이란 시에서 읊조렸듯,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는다.

“한때는 그렇게도 밝았던 광채가/이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인간의 고통에서 솟아 나오는/마음에 위안을 주는 생각과/사색을 가져오는 세월에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이 병행하는 삶이지만,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면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도 우리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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