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귀환, 붕괴 위기 빠진 자유무역 체제
도널드 트럼프가 4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 복귀하게 됐다. 강경 보호무역주의자와 트럼프 충성파 인물들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채워지면서 트럼프가 내건 ‘미국 우선’ 정책들이 큰 흔들림 없이 시행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세계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혼돈과 대립 상태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지난 30년간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에 서 있던 자유무역 체제는 급속히 변방으로 밀려날 위기를 맞게 됐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간 자유무역체제는 그동안 세계 경제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수많은 국가가 무역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WTO의 ‘2024년 세계무역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23년까지 전 세계 국가의 1인당 평균 소득이 미 달러 기준 7050달러에서 1만1570달러로 65% 늘었다. 중·저소득 국가의 1인당 소득은 1835달러에서 5337달러로 3배가량 대폭 증가했다. 한국이 2022년 세계 6위권 수출국이 되면서 경제 강국으로 올라선 것도 자유무역 체제 덕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2기 더 세질 보호주의에
WTO 체제, 존립 위기로 내몰려
중국 반시장 행태 제재에 무기력
협상과 분쟁 해결 기능 등 마비돼
통상 문제, 규칙에 의한 해결보다
국가 간 역학관계 따라 풀릴 전망
하지만 WTO는 이미 1기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미국과 충돌하면서 약화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존립의 위기로까지 내몰리게 됐다. 트럼프 1기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는 사사건건 WTO와 충돌했다. 그는 WTO가 미국을 망쳤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WTO 상소기구 위원 임명을 저지해 분쟁 해결 기능을 망가뜨리기 시작했고, WTO 규칙에 반하는 관세 부과로 WTO의 힘을 뺐다. 지난 1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가 라이트하이저를 ‘무역 차르(Trade Czar)’로 임명해 트럼프 2기 미국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게 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보도했다.
미, 중국의 MFN 지위 철폐할 수도
트럼프 2기에 펼쳐질 보호주의 통상 정책은 트럼프 1기 때보다 더 세다. 트럼프는 10~20% 보편관세 외에 중국에 대한 60% 관세, 멕시코산 자동차에 대한 200% 관세 부과 등 상상 가능한 온갖 형태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했다. 게다가 중국에 부여한 ‘최혜국 대우(MFN)’ 철폐를 강행할 가능성도 있다. 최혜국 대우는 WTO 다자간 무역 체제의 근간이 되는 핵심 원칙으로, 중국에 대한 MFN 지위 철폐는 WTO 무역 체제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셈이다.
트럼프는 왜 이처럼 WTO를 적대시하게 됐을까. 근본 이유는 미국을 자유무역의 피해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트럼프는 미국의 막대한 무역적자가 자유무역의 결과라고 본다. 2023년 기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7734억 달러로 2022년보다는 감소했지만 여전히 크다. 나아가 중국과의 경쟁에 노출된 미국 내 제조업 종사자의 소득이 줄었고, 일리노이와 미시간, 위스콘신 등 소위 ‘러스트 벨트(Rust belt)’ 지역의 수출이 감소하는 등 자유무역의 피해를 본 지역과 계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이 트럼프의 보호무역 정책의 토대가 됐고 WTO 자유무역 체제를 부정하는 배경이 됐다.
또 다른 이유는 WTO가 중국의 반(反)시장적 행태와 반칙 행위를 제재하는 데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서방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계기로 중국이 시장 경제의 일원으로 합류하길 기대했다. 그러나 중국은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유지하면서 세계 공급망을 장악했다. WTO는 중국의 비시장경제 행위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WTO 내에서 중국의 발언권은 강해져 갔다. 이에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에 돌입한 트럼프 행정부는 WTO를 배제하고 그 기능을 약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WTO 다자간 자유무역 체제가 세계 경제의 중심 질서로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설사 미국의 견제가 없다 하더라도 WTO 무역 체제는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와 모순을 안고 있었고, 이런 문제로 인해 WTO의 영향력은 이미 쇠퇴하는 중이었다.
도하 라운드, 14년 협상 끝 결렬돼
무엇보다 WTO의 협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규범 협상은 WTO의 존재 목적 중 하나다. 이를 통해 WTO가 세계 경제가 당면한 새로운 도전들을 해결해 낼 수 있다면 WTO는 계속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WTO는 최근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특허권 포기 같은 제한된 분야에서의 협상에 성공한 것을 제외하고는, 보다 의미 있는 무역 협정 타결에는 계속 실패하고 있다. 2001년 시작했던 포괄적 무역협상인 도하 라운드가 14년간의 협상 끝에 결렬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2월에는 어업으로 먹고사는 개발도상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각국의 어업보조금을 규제하자는 어업보조금 규제 협정이 인도의 반대로 결렬됐다.
게다가 WTO의 만장일치 원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된 다수의 협상 참여국 간 ‘복수 간 협정’ 마저도 무산될 상황이다. 최근 128개 WTO 회원국이 합의한 ‘개발을 위한 투자원활화 협정’이 복수 간 협정의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인도와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의 반대로 WTO 협정으로 채택되지 못한 것이 그 예다. 앞으로도 이념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166개 WTO 회원국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역 체제는 결국 세계 경제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WTO에서 남발되는 ‘허공으로의 상소’
WTO의 또 다른 문제는 마비된 분쟁 해결 기능이다. WTO 무역체제는 ‘규칙에 기반을 둔(rule-based)’ 예측 가능하고 개방적인 다자간 경제 체제다. 각국은 잘 정비된 무역 규칙에 입각해 개방된 글로벌 시장에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 또한 강력한 법 집행 수단을 통해 힘이 약한 국가도 강대국의 일방주의적 무역 조치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다. WTO의 분쟁 해결 기능은 이러한 ‘규칙 기반’ 무역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요소다. 분쟁 해결 기능이 작동하지 않으면 규칙을 집행할 수 없고 따라서 더 이상 ‘규칙 기반’ 체제가 작동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WTO 분쟁 해결 절차는 상소기구의 마비로 규칙의 집행력을 상실했다. 1심에 해당하는 패널단계에서 패소한 국가는 그저 상소장만 제출함으로써 패소 판정을 사실상 무효화하고 집행을 면할 수 있다. 2심에 해당하는 상소 기구에 재판할 재판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상소를 ‘허공으로의 상소(appeals into the void)’라 부른다.
지금 WTO 패널이 내린 판정 중 3분의 2는 ‘허공으로의 상소’로 이어지고 있다. 허공 상소를 가장 많이 사용한 나라가 미국이다. 전체 상소 건의 38%를 차지한다. 한국도 허공 상소의 피해자다. 2021년 미국이 소위 ‘불리한 이용가능 정보’(AFA)를 사용해 한국산 철강과 변압기에 부과한 반덤핑 및 상계관세를 시정하라는 WTO 패널 결정에 대해, 미국은 허공 상소로 패널 판정을 무력화시킨 바 있다. 다른 나라도 미국의 뒤를 따라 무익한 상소를 남용하고 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는 자신의 니켈 수출 금지 조치의 해제를 명한 WTO 패널 판정에 대해 ‘공허한 상소’를 해 판정의 효력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광물에 대해서까지 수출 금지를 확대하고 있다. 인도는 자국의 “경제특구 보조금이 WTO 규칙에 위반된다”는 패널 판정이 내려지자 공허한 상소를 제기해 패널 판정을 무효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도 보조금 사건의 승소국은 미국이었다.
WTO 규범보다 자국 이익 앞세울 듯
WTO 분쟁 해결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한 회원국 간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이런 기능 회복에 동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신이 취할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들이 구속력 있는 분쟁 해결 절차에 회부되는 것을 미국 스스로 원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WTO 자유무역 체제는 이제 강제력을 잃은 명목상의 경제 질서로 전락하게 될 상황이다.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이미 약화한 WTO 무역 체제는 결정타를 맞게 됐다. 앞으로 대부분 국가는 통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WTO 규칙을 실효성 있는 구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WTO 규범에 기반한 무역 질서를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단기적 이익을 앞세워 판단하고 행동하는 국가가 늘어날 것이다.
이는 이제 통상 문제의 해결이 규칙에 의한 해결보다는 국가 간 역학 관계에 따른 해결로, 사법적 해결보다는 당사자간 협상에 의한 해결로 옮겨가게 됨을 의미한다. 그만큼 통상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법은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게 됐다.
김두식 테크앤트레이드 연구원 상임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