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낡은 지붕과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처연하게 들리는 새벽녘, 자꾸만 닫아두고 잠가 두려는 마음을 애써 열어본다. 요 며칠 산만한 일과 정리되지 않는 감정에 휩쓸려 마음이 옹졸해졌다. 부처님 마음을 흉내 내며 사는 것도 순간 잊어버리고 표정마저 점점 굳어진 듯하다. 늘 그러하듯 문제의 원인을 찾아보았으나, 딱히 어딘가에 표시해 놓을 만큼 문제가 될 만한 사건도 없다. 그저 사소한 잡일들이 난무하는 내 번잡한 삶이 싫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개나 고양이가 오줌 싸서 영역 표시하듯,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고 차지하려는 본능이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모습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남 위로가 먼저인 종교인의 삶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해져
마음의 잡티 씻는 거울 있다면

이 일은 좋고 저 일은 싫고, 이 사람은 이쁘고 저 사람은 밉고, 이런 감정들은 너무나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우리를 구속하고 압박하는 스트레스 상황이란 게 대부분 이런 감정들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나처럼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있는 출가자의 사회적 관계망에서는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 바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과한 감정들이다.
나름의 변명을 좀 하자면, 나도 중생인지라 겉으로는 천연덕스럽게 지혜롭고 자애로운 수행자처럼 말하면서도 마음속 밑바닥에서는 귀찮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릴 때도 있다.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강할수록 삶이 괴로워진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깊숙하게 알아두어서 욕심이나 집착 같은 건 좀 덜한 편이지만, 대신 지친 마음에 자꾸만 게으름 피우고 싶고 훌쩍 떠나고 싶어질 때는 여전하다. 일종의 도피심리랄까.
“인간의 얼굴에 깃든 고요가/ 화산과도 같다면/ 속에는 거대한/ 끓어오르는 고통의 모습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의 삶을 극화한 영화 ‘조용한 열정’의 한 장면에 나오는 시구이다. 유추할 수 있듯, 오로지 창작에 몰두하여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그도 마음의 감기라고 일컫는 우울증을 감내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시속 100㎞까지 달릴 수 있는 고속 도로를 최저 속도 60㎞로 달리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라고 할까. 영화적 재미를 넣지 못한 융통성 부재의 감독 재량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에밀리 디킨슨의 삶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인 것을 느린 화면이 거듭될수록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엄격한 종교적 가치관을 제일로 추구하는 여성 신학교의 규율과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 매사추세츠로 낙향한 뒤에는 단 한 번도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남북전쟁이라는 격랑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단절된 삶을 보낸 것이다. 상대적 비교를 하자면, 강인한 여성의 삶을 다루었던 마거릿 미첼의 원작 소설이며, 영화로 나왔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의 반대라고 보면 되겠다.
아무튼 정작 자신은 지쳐 괴로우면서도 상처 입은 이들이 찾아오면 인도의 현자라도 되는 양 슬기로운 이야기를 전하며 상대가 행복해지도록 위로하고 축원하는 삶, 이것이 종교인의 현실이다. 어찌 보면 위선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한 행위의 결과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이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리고 힘을 얻은 그들에게서 되레 나도 힘을 받아 살아간다.
인생길을 돌아보면 더러는 자기 마음을 속이기도 하고, 나태함과 우울함의 나락에 하염없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이별 앞에 망연자실한 적도 있었고, 분노에 차 말을 함부로 내뱉을 때도 있었고, 가슴뼈의 뭉근한 통증부터 살을 에는 듯한 상처도 남아있다. 물론 누구든 그럴 수 있다. 나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자신이 고치고 싶은 관계나 나쁜 습관을 바로잡지 못하고 자꾸만 그걸 반복한다거나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을까.
내 마음속 밑바닥 진실은 아마도 몸도 마음도 편히 살고 싶다는 안일한 희망이 깃들어있는 것 같다. 결국 남을 행복하게 하려면 나 자신부터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남기신 어록 ‘행복 십계명’ 중에 첫 계명이 “자신의 인생을 살고, 타인의 인생도 존중하라”이다. 이는 곧 불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와 일맥상통한다. 내가 행복해야만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인 것이야 버리거나 줄일 수 있다지만, 일과 사람과 얽힌 관계의 고리는 쉬이 끊어낼 수 없는 법이니까.
수행자인 나도 가끔은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하나쯤 있으면 하는 바람을 하게 된다. 그 거울은 보정 기능까지 있어 마음의 잡티까지 제거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투정을 동반한 바람은 이쯤에서 끝내고 법당에 가야겠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