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나이 바보의 마음 산책

2025-05-20

네모진 콘크리트 벽에 깨끗한 벽지를 바르는 순간 콘크리트 벽이라는 점을 잊게 된다. 거실이라고 하여 아파트 평수 따라 공간의 넓이도 다른데, 거실 공간의 정면 중앙에는 가족사진을 앉히고, 오른쪽으로는 지리산 일출광경의 사진을 걸었다. 왼쪽 탁자 위에는 집주인의 작품인 천 년 학이 얹혀 있다. 따라서 가족사진 아래 긴 탁자 위에는 TV가 턱 버티고 있다. 그 맞은편 의자에서 집주인은 때때로 하품을 하며 별로 볼 것도 없는 TV 화면을 보며 다이얼을 돌리다 침실로 들어가 홀로 잠을 청한다.

5월이 깊어지면 산과 들의 나뭇잎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초록에서 녹색으로 건너가면 산 까치들이 제법 시끌벅적하고 운 좋은 날은 꾀꼬리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대지마을 과수원에도 가랑비는 내리고 있었다. 잠시 산책을 한답시고 서서히 걷는데 복숭아나무 과수원은 나무 아래의 풀들을 개운하게 베어냈다. 그곳엔 살찐 암탉들이 뒤뚱뒤뚱 거닐고 목과 꼬리가 긴 수탉은 붉은 몸매에 긴 다리로 겅중겅중 걷다가 꼬끼오! 꼬끼오! 하고 자기 영역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때 나는 잃어버린 고향 풍경을 소환하게 된다. 그리고 무심히 잃어버린 사람과 고향에서의 삶을 반추하거나 추억을 더듬으며. 내가 나를 위로하며 아무도 없는 아파트 공간으로 돌아와 나이 바보(老바보)로서의 마음 산책을 하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어린 시절 내 어머니와 함께 고향 마을 초가에 살면서 밤이면 어머니 곁에서 밤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던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다.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잠을 깨우면서 속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소낙비 소리도 좋다. 하지만 어둠을 타고 천천히 내리는 빗소리 또한 클래식 음악의 낮은 선율 같이 아름답게 들렸다. 조용히 흐르는 밤비 소리는 밤중에 문득 깨어난 사람만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잠을 깨워 놓고 사라졌다가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다시 돌아오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봄밤에 흐르는 빗소리는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그 어느 소리보다 깊고 부드럽고 낮은음으로써의 우아한 교향곡인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어머니 곁에서 잠들었다 깨어나 밤비 오는 소리를 듣는 그 순간이 내게는 최초의 행복이었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황석영 작가는 ‘상상하고 독서해야만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생긴다’고 했다. 책 읽기는 운동하는 것과 같다. 아령으로 작은 근육부터 키워내듯 책을 읽고 마음과 몸으로 사상을 표현해야 한다.

어느 소설가는 ‘나의 소설 쓰기는 철학적 사유보다 ‘장인이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면서, 장인 정신이 내 글쓰기며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어떻게 써왔으며 무엇으로 살아왔는가? 싶을 때가 있다. 이래저래 나는 젊어서나 지금이나 존재의 감옥에서 독방의 수인(囚人) 같이 살아오면서,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 길에서 나는 '인디언의 잠언' 속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우리는 변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변하지 않으면 생이 멈춘다. 그러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을 대하는 자세이다. 매 순간 우리는 배움을 얻어야 하며,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전에 직접 경험하고 느껴야만 한다’는 –체로키족, 세퀴지 히플러-의 말을 읽고 공감하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순간순간이 배움이고 기쁨이길 소망했다.

사각형 콘크리트벽 속 ‘존재의 감옥’에서도 허가된 외출이 있다면 주저 없이 길을 나서야 한다. 그날도 그렇게 허리가 아프고 목 근육이 저려와 운동화로 갈아 신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노(老) 바보’의 생각의 탄생을 위한 길의 산책시간이 온 것이다.

건지산 입구에서 있었던 풍경이다. 젊은 부인이 정성스럽게 강아지를 안고 가는데 지나가는 할머니가 한동안 강아지를 바라보더니 “강아지가 예쁘네요.”한다. 개 주인으로서 젊은 부인의 대답이다. “강아지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니가 부인에게 묻는다. “그럼 뭐요?” 주인 여자 왈, “가족이에요.”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다시 “예?… 어쩌다 강아지를 낳았소? …”

솔 씨 하나에도 숲의 미래가 있다고 평소 생각했던 나다. 두 사람 대화를 엿듣고 가면서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국어사전에는 ‘가족’이란 단어 풀이에 ‘부모 형제 그리고 강아지’로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그런 뒤, 나는 헛웃음 날리며 내 갈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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