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AI: 제조 강국 향한 반란의 시작

2025-11-07

세계의 기술혁신을 이끈 실리콘밸리는 ‘반란’의 역사로 시작했다. 낡은 질서가 더 이상 미래를 설명하지 못할 때, 누군가 과감히 등을 돌리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 반도체를 발명한 윌리엄 쇼클리의 연구소에서 뛰쳐나온 8명의 반란군이 이렇게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세웠다. 이후 페어차일드는 인텔, AMD 등 수많은 실리콘밸리 벤처와 벤처 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 세콰이어 캐피털의 산실이 됐다.

기업 경영에 필수적인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산업 반란의 역사는 오라클 창업자 래리 엘리슨에서 시작해 세일즈포스 창업자 마크 베니오프, 시에라 AI(인공지능) 창업자 브렛 테일러로 이어진다. 시에라 AI의 가치는 2년 만에 100억 달러가 됐다.

스스로 진화하는 에이전트 집합

미래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

ERP·CRM·SCM 등과 연결해서

조선·반도체 산업 등에 활용해야

엘리슨은 1970년대 말 IBM이 지배하던 데이터베이스 분야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10여 년 만에 이 시장을 지배하게 됐다.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1990년대 말 그가 총애하던 베니오프는 오라클을 떠나 세일즈포스를 세우면서 “소프트웨어는 더 이상 설치하는 패키지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구독하는 서비스”라고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했다. 베니오프의 반란은 클라우드와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시대를 열었다. 젠 AI의 시대가 열리자, 2년 전 베니오프의 후계자 테일러가 또 한 번의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2023년 시에라 AI를 창업하며 이렇게 말했다. “CRM(고객관계관리)과 ERP(전사적자원관리)를 사람이 클릭하며 사용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AI가 스스로 목표를 이해하고, 도구를 조합해 실행하는 자율형 기업 운영 시스템이 필요하다.”

오라클의 데이터베이스 시장에 도전하던 나의 서울대 실험실 벤처가 2005년 오라클의 ERP 시장 공격에 직면해 있던 SAP에 인수된 후 나는 2014년 초까지 SAP HANA의 개발을 주도하며 SAP ERP가 관리하는 기업의 중추적 비즈니스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실시간 비즈니스 결정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를 기반으로 새로 만들어진 SAP ERP인 S/4HANA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애플, 토요타 등 전세계 굴지의 기업, 특히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제조 기업들의 기업 운영의 중추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젠 AI 때문에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중에도 SAP가 지원을 중단한 구형 ERP에서 S/4HANA로의 전환을 서두르는 기업들이 줄 서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SAP HANA는 기존 의사 결정 프로세스의 가속 엔진 기술일 뿐 SAP, 세일즈포스, 오라클의 ERP/CRM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복잡도(complexity)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SAP 시스템에는 10만개에 가까운 데이터베이스 테이블이 정의되어 있다. 이 테이블들을 오랫동안 개발되어 온 수백만 라인의 코드가 둘러싸고 있다. 사용자는 이런 거대한 시스템 앞에 결국 클릭과 입력이라는 반복된 행위에 갇힌다.

에이전트 기반의 젠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업 경영 시스템을 비즈니스에 꼭 필요한 기능별로 책임을 맡아 사람과 소통하는 에이전트로 나누어 이들의 네트워크 형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 각각의 에이전트는 사람 또는 다른 에이전트와의 대화를 통해 비즈니스의 목표를 이해하고 플랜을 함께 만들어낸다. 플랜을 실행하면서 원래 목표와의 간극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이를 감지해 관련된 기상 에이전트나 사람들에게 통지하고 새로운 수정 플랜을 제시한다.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자율성도 커지게 된다. 즉, 이 새로운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AI 패러다임의 핵심은 모듈화되고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고 스스로 학습해 진화하고 스스로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에이전트의 집합이다.

도입 초기에는 ERP, CRM, PLM(제품수명주기관리) 등 기존의 레거시 생산 현장 및 경영 시스템에 접속해 에이전트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하고 이들 시스템의 기능도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통해 호출한다. 오픈 AI 챗GPT나 구글 제미나이 같은 LLM(거대언어모델)이 이런 기업 의사 결정 에이전트의 운영체계(OS)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에이전트 아래에는 기업의 경영 데이터베이스와 비정형 멀티모달 데이터를 담은 저장소가 기업 고유의 자산으로 관리된다.

자유 세계의 얼마 남지 않는 제조업 국가인 한국은 제조 현장의 작업과 공정에 물리적 AI를 적용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AI만으로 중국을 넘어서는 제조업 일류화를 이룰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한 로봇이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한다 해도, ERP의 재고 데이터, CRM의 고객 수요 예측, SCM(공급망관리)의 공급망 위험, PLM의 설계 변경 정보와 연결되지 못하면 이는 고립된 자동화일 뿐이다.

미래 제조 경쟁력은 제조 현장 AI와 경영 AI를 하나로 연결하여 기업을 운영하는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AI가 되어야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된다. 한국의 조선, 반도체, 배터리, 제련, 방위 산업은 지금 이런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앞서 출발한 많은 기업들이 SAP, 세일즈포스, 오라클과 같은 복잡한 레거시 기업 시스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기존의 룰에 따라 같은 레거시의 늪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이 글을 쓰게 됐다. 제조 강국을 향한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AI 반란의 타이밍이다. 한국은 이 반란을 주도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는 자유 세계의 제조국가이다.

차상균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 석학 펠로우, 서울대 명예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