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 있는 퇴진’은 과연 가능할까. 윤석열 대통령의 납득할 수 없는 행보에 대한 수사 결과가 속속 보도되고 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구속 수감 중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검찰의 공소장은 윤 대통령을 ‘내란 수괴’로 적시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을 향한 야권과 시민들의 압박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14일 두 번째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이 크다. 말 그대로 ‘대열이 무너지고’ 있으니, 질서 있는 퇴진은 이미 실패했다.
그리스 크세노폰의 생존 교훈 배워야
문득 고대 그리스의 군인이자 철학자였던 크세노폰이 기원전 4세기에 쓴 전쟁 회고록, 『아나바시스』가 떠오른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황폐해진 그리스는 용병단을 보내 먹고 사는 처지로 전락했다. 크세노폰과 1만 명의 용병단도 그런 이유로 페르시아에 갔지만, 흉계에 휘말려 지도부 전원이 암살당한 후 적진에 고립되고 말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페르시아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면 우리는 너희들을 친구로 대하리라”고 요구한다. 그리스 중장보병들은 답한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질서 있는 퇴진은 불가능 판명
14일 표결 앞두고 압박 거세져
계엄령 반대했던 정신 살려야
영남 콘크리트 지지층은 환상일 뿐
불리한 상황일수록, 고립무원의 처지일수록,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주체적 행동의 여지를 파악하고, 남아 있는 운신의 폭을 최대한 활용하여, 반드시 전열을 유지하면서 물러나야 한다. 살아서 그리스로 돌아오려면 창과 방패를 놓아서는 안 된다. 때로는 방어를 위한 공격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질서 있는 퇴각’이 가능하다. 미 육군사관학교 등에서 반드시 읽히는 군사학 리더십의 고전, 『아나바시스』의 교훈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포위당한 국민의힘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대열이 무너지고 있다. 탄핵 찬성으로 돌아서는 의원들이 속속 나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동반 추락 중이며, 심지어 대구·경북(TK)에서도 민주당에 지지율을 역전당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일단 ‘콘크리트 지지층’이 국민의힘의 무기라는 환상을 깨야 한다. 실제로는 TK 민심이 TK를 텃밭으로 여기는 정치인들보다 더 앞서 나가고 있다. 당 주류가 선호하지 않았던 한동훈, 그 이전에 이준석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는 사실만 봐도 분명하다. 유권자는 변화를 원하는데 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정치는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의힘이 지닌 진짜 무기는 따로 있다. 도덕적 우위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계엄을 선포한 것은 윤 대통령이다. 하지만 한동훈 대표가 곧장 반대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을 이끌고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을 가결했다. 당원의 투표로 뽑힌 당 대표가 계엄에 반대하였으므로 국민의힘 역시 계엄에 반대한 정당이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탄핵 중독 정당’이 되어버렸다. 이재명 대표 체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탄핵안이 한 차례 부결된 이후, 여론조사와 달리 장외 집회가 2016년 탄핵 정국만큼 불타오르지는 않았다.
한·미·일 공조가 탄핵 사유라는 민주당
과연 민주당은 탄핵을 통한 헌정 질서의 회복을 진지하게 바라고 있을까. 지난 7일 부결된 1차 탄핵안을 보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외교를 통한 한·미·일 공조 강화, 대북 억지력 확보 등이 대체 왜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로 적시된 걸까. 그런 탄핵안을 가결하는 것은 헌정 질서의 회복이 아니다. 윤 대통령 탄핵을 빙자해 한미 동맹이라는 외교와 국방의 근간을 뒤흔드는 짓이다. 지난 10일 ‘미국의 소리(VOA)’가 우려하는 기사를 내보낸 이유다.
헌정 질서 회복을 위해 윤 대통령은 탄핵당해야 한다. 하지만 탄핵이 곧 헌정 질서의 회복은 아니다. 민주당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우며 자기 정파의 이익만을 위한 최악의 탄핵 정국을 유도하고 있다. 어떤 탄핵안으로 어떻게 탄핵하느냐도 중요하다. 헌정 질서 수호를 목적으로 삼는 정제된 탄핵안이, 국회뿐 아니라 국민 전반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의회에서 통과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결론은 하나뿐이다. 국민의힘 스스로 탄핵안을 작성하고 발의하여 통과시키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국민의힘 내부의 반발도 문제지만 민주당과 야권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정족수의 과반이 필요하다. 국민의힘 단독으로는 발의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당이나 야권이 국민의힘 자체 탄핵안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큰 문제다. 탄핵을 헌정 질서 수호가 아닌 이재명 대표 방탄을 위해 남용해왔다고 스스로 실토하는 꼴이니 말이다.
국민의힘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럴 때 방패만을 들고 있어 봐야 소용 없다. 어떤 한 점에 집중하여 공격을 해야 살아날 길이 뚫린다. 국민의힘 스스로가 탄핵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라. 『아나바시스』의 많은 분량은 그리스 중장보병들 사이의 토론에 할애되어 있다. 크세노폰과 1만 명의 고립된 용병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 조선을 지켜낸 이순신 장군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국민의힘은 이런 자세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해야 한다. 야권과 국민을 향해 올바른 탄핵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현재 예상처럼 한두 사람씩 이탈표가 나와 무너지면 보수의 미래는 더 어두워진다. 헌법 질서를 지키기 위한 주도적인 탄핵, 그것이 국민의힘이 취할 수 있는 ‘질서 있는 후퇴’의 길이다.
노정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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