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과 강주룡, 원산 총파업까지···칼로 새긴 독립전쟁

2025-03-03

이동환의 경기도 파주 작업실 창문엔 ‘탄핵이 답이다’를 새긴 목판화 작품 하나가 걸려 있다. 이 글 가운데 놓인 건 뱀 한 마리다. 윤석열과 김건희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유명한 이미지 중 하나인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차용한 뱀 배 속에 들어 있다. 뱀 아래위 글귀는 “사악한 것들 다 삼켜버려!”다.

이동환은 두 목판화 작품을 을사년 연하장으로 지인들에게 보냈다고 한다. 수년 전 크리스마스 때 강경구(전 가천대 교수)에게 카드를 보냈는데 목판화 작품을 답장으로 받았다. “어, 목판화가 이런 거구나” 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고 묵직한 목판화의 매력을 새삼 느꼈다. 이동환은 이듬해부터 자기도 신년이면 지인들에게 목판화 작품을 만들어 보냈다.

이동환은 한국화 작가다. 이때까지도 목판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책 한 권 다시 읽은 게 ‘판화가’를 겸하는 계기가 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오랫동안 책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예전에 대략 읽고 말았는데, 우연히 책꽂이에서 이 책을 보고는 정독했어요.” 장준하의 <돌베개>다. “역사적인 의의가 어쩌고 하는 내용이 아니었어요. 끌려가고, 얼어 죽을 뻔하고, 항의하고 투쟁한 장준하 선생 경험이 1인칭 시점으로 고스란히 녹아 감동했지요.”

책 읽을 때마다 떠오른 이미지 30점을 우선 목판화로 만들어 볼까 했다고 한다. 책 중간중간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결과물은 130판이다. 2018년 <칼로 새긴 장준하>에 실었다. ‘칼로 새긴 장준화’와 ‘가슴에 품은 돌베개’ 제목의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하나의 주제나 인물을 두고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는 드물다는 점에서 미술계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것 같았다. 멋진 일을 해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고 한다.

선후배들이 목판화 작업을 해나가길 바랐다고 한다. 장준하 다음에도 독립운동가를 하려 한 건 아니다. 독립운동가를 포함해 노동운동가, 종교인, 민주화 투사 등 근현대사 여러 인물 자료를 뒤졌다. 이회영 관련 자료들도 살폈다. <돌베개> 같은 ‘개인 체험과 서술’이 없어 큰 감동은 못 느꼈다고 한다. 이회영 기념관을 찾았다가 학예사가 건네준 낡은 복사본 책을 읽고는 다음 주제를 결정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이 1966년 쓴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다. 김규식, 신채호, 이상룡, 이동녕 등 200명의 독립운동가가 등장한다. 1910년부터 1932년 이회영 순국, 1945년 광복 전후, 한국전쟁 이야기도 들어 있다. 이동환은 “이은숙의 체험을 담은 책이라 와닿았다. 속살 깊은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은숙과 이회영을 서사 중심에 넣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첫 작품은 이은숙의 모습을 담은 목판화다. ‘칼로 새긴 독립전쟁’ 첫판이다. 2019년 5월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onghwan.lee.54379?locale=ko_KR)에 공개했다. 그 뒤로도 최근까지 매주 한 편 가량을 올린다. 올해 삼일절 게시한 ‘백 예순 번째 판’은 ‘이회영의 죽음’이다.

“역사 속 주요 사건이나 위인이 어느 순간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물 간, 사건 간, 인물과 사건 간 원인, 과정, 결과가 이어지는 걸 확인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과 사건이 상호 관계를 맺고 영향을 끼치며 역사를 이룬다는 걸 목판화 작업을 하며 배웠습니다.” ‘을밀대 고공 농성’의 항일노동운동가 강주룡을 ‘칼로 새긴’ 이유도 여성노동자들의 동맹파업과 항일민족운동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1929년 원산 총파업 등 여러 노동운동 장면도 재현했다.

이동환은 이 작업을 하면서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했다. “사람들은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이런 분들 위주로 독립운동을 들여다보죠. 목숨 걸고 독립운동했는데, 흔적도 없이 존재가 사라지는 예도 있더라고요. 이런 분들을 더 발굴해야 하고, 저도 그림으로 더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회영의 순국 이후부터 광복 전후 시기까지 담으려 한다. 광복절 즈음 전시회 개최 등도 검토 중이다. ‘칼로 새긴 독립전쟁’ 다음 작업도 정해뒀다. 목판화 작업은 일제 강점기 전후 러시아로 간 고려인 이야기를 담은 ‘칼로 새긴 고려인’이다. 러시아 현장 답사도 하려 한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이동환의 목판화 작업을 높게 평가한다. “오윤에서 발원한 목판화의 민중성, 신화성, 해학성이 이동환의 역사성과 만나 뜨거운 ‘불숨’의 칼맛을 피워낸다. 그가 십수 년째 새기고 있는 근현대를 관통하는 ‘독립정신’에서 중요한 새김의 주제는 ‘정신’이다. 인물도 인물이지만, 구름무늬를 비롯해 불꽃, 회오리, 바람결, 빛 알갱이 등 살아있는 산알(生靈, 생령)의 표현은 대단하다. 두텁고 무뚝뚝한 칼맛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목판화의 ‘정신’은 황홀하다”고 평했다.

이동환은 ‘칼로 새긴 장준화’ 이후 목판화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한국화 작업도 병행했다. 외환위기, 박근혜 탄핵, 세월호 참사 등을 다룬 한국화 작업을 해왔다. 2020년대 초 발표한 ‘고래 뱃속’ 연작은 각종 플라스틱 폐기물과 그물 때문에 죽은 고래를 매개로 부패한 한국 사회, 그곳에서 갈 곳 잃은 현대인을 표현했다.

사회성 짙은 작품을 두고 이동환은 “사회적인 트라우마를 겪으면 그게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들어온다. 나만의 비판 의식을 집어넣는 정도”라고 했다.

최근 작업 중인 건 ‘미치광이 연작’이다. 윤석열을 주제로 한 작품을 최근 완성했다. 이동환은 “윤석열은 ‘시대가 만든 괴물’이다. 광기 같은 걸 표현하려 화면 앞에서 붓을 집어 던지듯 붓질했다”고 말한다. 윤석열에 한정된 작품은 아니다. ‘미치광이 연작’에 자아 성찰과 반성도 담으려 한다. “흔한 말로 저도 꼭지가 돌 듯 이성을 잃고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곤 한다. 누가 옆에서 보면 ‘저 미친놈’ 하고 지적받을 수 있다. 지난 가을쯤 불현듯 나도 괴물이 돼 가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장미술’ 중심의 현 한국의 ‘미술시장’에서 돈 안 되는 작업들이다. 책 한 권 분량의 ‘칼로 새긴 독립전쟁’ 전 작품 고화질 이미지와 글을 페이스북에도 올려뒀다. 돈보다는 공유를 중요시한다. “하고 싶은 대로 작업하는 게 제 미술 활동의 목적이다. 타인의 취향이나 미술시장에 맞춰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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