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선 보라스, ‘시장의 왕’으로 돌아오다

2024-11-28

이 시대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로 구단에는 ‘악마’, 선수들에게는 ‘천사’로 불리는 스캇 보라스는 지난 겨울 메이저리그(MLB) 자유계약선수(FA) 시장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빅4’로 불렸던 블레이크 스넬, 조던 몽고메리, 코디 벨린저, 맷 채프먼을 데리고 세일즈에 나선 보라스는 예상 외로 구단들의 냉담한 반응과 마주쳐야 했다. 이들에 앞서 오타니 쇼헤이(10년 7억 달러)와 야마모토 요시노부(12년 3억2500만 달러)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LA 다저스와 계약했고, 그 이후에는 이들에게 포커스가 집중될 것이라 여겨졌기에 더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보라스는 스프링캠프가 끝나가도록 버텨봤지만, 결국 굴욕적인 ‘백기’를 들어야 했다. 이에 벨린저가 3년 8000만 달러에 시카고 컵스와, 스넬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2년 6200만 달러에 계약했고 채프먼 역시 샌프란시스코와 3년 5400만 달러 계약을 체결했다. 1년 2500만 달러라는 초라한 조건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한 몽고메리는 얼마 후 보라스를 해고했다. 이들 모두 보라스가 최소 총액 1억 달러 중반에서 2억 달러까지는 받아야 한다고 호언장담하던 선수들이었다. 결국 보라스의 최고 성공작은 포스팅을 통해 MLB에 도전한 이정후가 샌프란시스코와 맺은 6년 1억1300만 달러 계약이 됐다.

보라스가 실패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동안 보라스는 시장 상황이 어떻든 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 선수가 필요한 팀은 반드시 돈을 지불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겨울에 나타났던 현상은 바로 ‘양극화’였다. 다저스나 뉴욕 양키스, 뉴욕 메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처럼 큰 돈을 시장에 투사할 수 있는 빅마켓 구단은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한 팀은 철저하게 지갑을 닫았다. 앞서 오타니와 야마모토가 엄청난 금액의 계약을 맺는 것을 보면서 FA 선수들의 시장가가 더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우려가 구단들을 덮쳤다. 여기에 14개 구단과 중계권 계약을 맺고 있었던 밸리 스포츠의 소유주 다이아몬드 스포츠 그룹이 파산을 하면서, 다수 MLB 구단들의 재정 상황이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나빠진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빅4’가 다 리스크가 있는 선수들이라는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스넬은 구위만큼은 의심받는 선수가 아니지만 규정이닝을 채운 시즌이 사이영상을 탄 2018년과 2023년 2번 뿐이며, 몽고메리도 2023년 텍사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큰 공을 세우긴 했으나 전체적인 커리어를 놓고 보면 대형 계약을 선뜻 안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공수 겸장의 내야수 채프먼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하향세에 있었고, 벨린저는 2023년 20홈런-20도루, OPS 0.881을 기록하며 부활했지만, 직전 몇 년간 심각한 부진에 시달렸다. 이제는 양키스 같은 팀도 ‘리스크’가 있는 선수들에게 무턱대고 거액을 안기는 시대가 아니다.

보라스는 백기는 들었지만, ‘권토중래’의 심정으로 이들의 계약에 모두 옵트아웃 조항을 넣어놨다. 이들이 FA 재수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시장 상황이 다시 풀릴 것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상황은 다시 보라스를 ‘FA 시장의 왕’으로 만들고 있다.

우선 시장이 열리기에 앞서 채프먼이 지난 9월 샌프란시스코와 6년 1억5100만 달러에 연장 계약을 한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어 일본인 투수 기쿠치 유세이에게 LA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히면서 연평균 2100만 달러에 달하는 3년 6300만 달러 계약을 안겼다.

여기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스넬이 FA로 나와 다저스와 5년 1억8200만 달러 ‘대박’을 터뜨렸다. 왼손 투수로써는 데이빗 프라이스가 보스턴과 맺었던 7년 2억1700만 달러, 클레이튼 커쇼가 다저스와 맺었던 7년 2억1500만 달러에 이은 역대 3위에 해당하는 큰 계약이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이번 FA 시장의 최대어인 후안 소토 또한 보라스의 고객이다. 소토는 치열한 경쟁 탓에 오타니의 계약에 준하는 규모의 계약을 맺게될 것이라는게 중론이다. 그 밖에 ‘투수 최대어’로 꼽히는 코빈 번스, 피트 알론소, 김하성, 알렉스 브레그먼 등이 이번 FA 시장에 남은 보라스의 고객들이다.

사실 시장 상황이 다 풀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은 여전히 빅마켓 팀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겨울과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면, 바로 빅마켓 팀들이 스스로 경쟁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10승 투수가 한 명 밖에 없었던 다저스는 스넬 영입과 더불어 일본에서 건너오는 사사키 로키에게도 관심을 갖고 있다. 소토의 몸값은 빅마켓 팀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끌어올리고 있고, 번스도 보스턴 레드삭스나 시카고 컵스 같은 팀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밖에 다른 보라스의 고객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팀들 역시 빅마켓 팀들이 대부분이다. 다저스가 유행시키고 있는 ‘디퍼 계약’으로 인해 빅마켓 팀들이 ‘사치세’에 대한 부담을 덜게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미국 현지 매체들은 보라스가 다음달 10일부터 12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리는 윈터 미팅 전에 대형 계약들을 모두 마무리 지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겨울의 아픔, 브라이스 하퍼와 댈러스 카이클 등 시간을 끌었다가 망친 전례들이 있기에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예상이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이상, 보라스가 시간을 일부러 끌 이유는 없다. MLB 단장들이 보라스를 잘 안다고는 하지만, 보라스 역시 그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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