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영화, 인생 책, 그리고 인생 시

2025-03-05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이런저런 신변잡기와 관심사에 관해 대화하다 보면, 인생 영화나 인생 책을 질문 받는 경우가 있곤 하다. 마치 회사 면접 질문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 준비하듯이 저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어느 정도 대비가 되어있는데, 얼마 전 인생 ‘시’가 뭐냐는 질문을 처음으로 받고 굉장히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학창시절 정철의 사미인곡이라든지, 이상의 시라든지를 화자의 정서와 표현법에 교과과정에 맞추어 마치 MBTI F처럼 억지로 공감해가며 읽었던 기억만 있을 뿐 남에게 당당히 내 인생 시라며 마음에서 우러나와 추천해줄 수 있는 시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본과 2학년 2학기의 다시 없을 마지막 방학을 맞이했겠다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들러 시 코너를 뒤적였다. 나의 고약한 습관 중 하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무엇이든 처음 전개부터 흥미로워야 끝까지 결말을 보고싶어 한다는 것인데, 내 이목을 끌만한 제목이나 첫 챕터를 보이는 책이 없어 슬슬 흥미가 떨어져가던 찰나 한 시집의 제목을 발견했다.

<사랑하라,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류시화 엮음.

이 얼마나 짧고도 강렬한 제목이던가. 제법 관심을 가지고 시집을 찬찬히 넘겨보았다. 시집은 그 특성상 한 개의 시만 아니라 여러 개의 시가 묶여 있는데, 관심 없는 시는 대충 훑어보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 큰 울림이 있는 시를 발견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사막> , 파리 지하철 시 공모전 8천편의 작품 중 1등 당선

고작 5줄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시지만, 굉장한 먹먹함을 주었다. 어릴 때부터 우주를 좋아했던 나는 광막한 우주를 바라보며 반대로 내 삶이 너무 덧없게 느껴질 때가 있었고, 서로를 의지하는 깊은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기 어려워했었다. 태어나는 것은 곧 비극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공감하기도 했고, 인생은 곧 고통의 바다라는 불교적 생각에 심취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하루하루를 낭비하며 즐겁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시의 저자에 대해 찾아보던 중 결별의 슬픔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시의 절절함에 더 큰 공감이 갔다. 너무도 외로워 혼자지만 사실 누군가의 관심과 존재가 필요한 게 곧 인간이 아닐까.

그렇게 기분 좋게 인생 시를 건진 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집을 구매 하진 않고 교보문고를 나왔다. 시는 검색하면 원문이 나오니까. TMI지만 나의 인생영화, 인생책은 각각 백조의 노래, 코스모스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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