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2016년 12월, 필자는 신문을 인쇄하는 회사의 대표로 발령났다. 서울·안산·대구·부산 등 4개 공장에 윤전기 12대, 직원이 200명에 이르는 이 분야에선 국내 최대 규모의 회사였다. 당시 회사엔 만 55세 정년을 앞둔 고령 인력이 많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정년 연장제도 시행으로 이들의 정년이 만 60세로 연장됐다. 대표의 가장 중요한 일은 임금피크제로 고령 인력의 임금을 낮추면서, 이들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걱정이 앞섰다. 연공서열 문화가 뿌리내린 공장의 특성상 선배들이 후배 공장장, 팀장 밑에서 고분고분 일할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경력 30년 넘은 선배들은 후배들과 어울려 결속력을 발휘했다. 특히 윤전기에 문제가 생기면 선배들이 설계도를 뒤져가며 묘수를 찾아냈다.
조기 대선 표심 좌우할 정년 연장
정년 늘리되 고령자 임금 줄이고
청년 고용에 정책 지원 집중해야
2020년 2월 코로나19가 대구광역시에 창궐했을 때 중앙일보 대구공장은 전 직원 24명이 한 달 동안 공장에서 합숙을 감행해 감염자 없이 위기를 넘겼다. 전 직원의 동의서를 받아내 합숙을 이끈 이는 강남공장장 출신의 베테랑 선배였다. 고령자들은 임금피크제로 연봉이 정점의 60%까지 낮아졌지만 5년 더 회사를 다닌다는 데 만족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었는데, 무엇보다 정년 연장이라는 공약에 끌렸다고 했다. 그러나 정년이 늘어난 숙련 근로자들이 남게 되자 청년 고용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대표로 재직하던 4년간 겨우 6명을 신규 채용했는데, 그나마 2명만 남았다. 중소 제조업은 정년 연장과 청년 고용을 병행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으로 조기 대선이 실시되면서 정년 연장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일 정년 연장 태스크포스를 출범했다. 법정 정년을 만 60세에서 65세로 늘리는 법안을 9월 정기국회에 상정해 11월 통과시킬 계획이다.
민주노총은 정년 연장의 다섯 가지 원칙을 정하고 임금피크제 방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앞서 대법원은 정년을 앞둔 직원에게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려 민주노총의 요구에 힘을 실어준 상태다.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더라도 임금체계를 크게 개편하지 않은 정년 연장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가뜩이나 ‘고용절벽’에 갇힌 청년들의 일자리는 더 줄어들 게 뻔하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고령 근로자가 1명 늘어날 때 청년 근로자는 약 1명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마도기와오지상’이라는 사내 실업자가 경제 성장의 걸림돌로 부각되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지만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퇴근하는 고령층을 말한다. 50~60대 고임금 직원으로 현재 5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한국도 일부 대기업에서 고임금 고령 근로자의 비중이 높아졌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현 직원의 20%(1만6000명)가 만 55세를 넘은 고령 인력이다. 정년을 연장하면 이 많은 숫자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정년을 만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면 국내 기업들은 연간 16조원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청년이 사라지면 한국은 붕괴한다. 대책 없이 정년만 늘리면 기업들과 청년들의 해외 탈출이 가속화되는 재앙으로 이어질 것이다. 청년들의 좋은 일자리를 늘리려면 고령층의 양보가 필요하다. 노사정이 만 60세 이후엔 임금을 정점의 절반 이하로 낮추고, 대신 그 여력만큼 청년 고용을 늘리는 데 합의해야 한다. 정부는 정년 연장에 앞서 청년을 고용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 등 각종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청년들이 그들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로 우선 배치되고, 고령자들이 부족한 일자리를 메우는 쪽으로 노동시장을 재편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약자는 정년을 앞둔 고령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시장에 진입조차 못 하는 청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