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독식'
반도체 업계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단어다. 우리나라 대표 수출품인 메모리만 보더라도 그렇다. 규모의 경제를 확보, 대규모 설비 투자를 단행한 회사가 주도권을 잡았다. 가격·물량으로 밀어붙여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면, 그 수익으로 다시 투자 우위를 견고히 했다. 이런 방식으로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치킨게임'을 이겨낸 한국은 메모리 시장을 주도하게 됐다.
30년 이상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 최전선에서 뛰어왔던 박광선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이하 어플라이드코리아) 대표는 최근 승자독식 체제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진단했다. 가격이 최우선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 대표는 “예전에는 가격 경쟁력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디자인 윈(Design Win)' 시대”라며 “반도체 성능이 제대로 나와야 시장을 독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승자독식의 방법론이 바뀌었다는 풀이다. 가격 경쟁력만 앞세워서는 더 이상 반도체 패권을 쥘 수 없게 됐다. 최근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형세가 '디자인 윈'의 대표 사례다. AI 연산을 위해 고성능 AI 반도체를 구현할 수 있다면, 가격은 큰 문제가 아니다. AI 시장 패권을 쥔 엔비디아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은 하나 당 가격이 4000만~5000만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미 1년치가 완전 판매(완판)될 만큼 수요가 크다.
이같은 변화는 반도체 공급망 패러다임 전환도 요구한다. 박 대표는 “앞으로는 반도체 미래 기술을 얼마나 빨리, 잘 확보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진다”며 “이를 위해서는 '생태계'가 강해져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최근 기술 개발부터 인력 운용, 소재·부품 공급망까지 대대적인 변화를 주는 이유다.
전자신문은 1994년 어플라이드코리아에 입사, 30년 넘게 한국 반도체 산업 생태계 변화를 눈으로 봐온 박 대표로부터 '강한 생태계'가 무엇인지 들었다. 또 향후 반도체 시장의 미래와 점점 치열해지는 반도체 패권 다툼 속에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어플라이드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로 꼽힌다. 어플라이드 입장에서 봤을 때 최근 반도체 제조사의 공급망 생태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어플라이드는 다양한 반도체 장비 포트폴리오를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 곳곳에서 접점을 가지고 있어 고객사(반도체 제조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최근 반도체 제조사는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고 반도체 제품을 만들려고 한다. 어플라이드는 그 제품 안에 들어가는 모든 구성 요소를 제공해야할 것이다. 단순 제공이 아니라 이를 최적화시키고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 기술을 가져와야한다.
예전에는 이미 나와있는 기술을 조합해 충분히 저렴하고 경쟁력 있는 반도체 제품을 만들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반도체 제조사가 원하는 제품은 어마어마한 투자 비용을 필요로 한다. 일회성도 아니고 계속 투입되는 규모다. 지금 당장 나와있는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어서다. 대표적으로 현재 연구개발(R&D) 중인 3차원(3D) D램이나 후면전력공급장치(웨이퍼 뒷면에서 전력을 공급해 효율을 극대화한 기술) 등은 상용화된 사례가 없다.
결국 반도체 제조사가 우리와 같은 소부장 기업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술을 구현할 신물질을 찾고 새로운 플라즈마 기법을 도입하는 등 협력 체계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 체계, 즉 에코시스템이 잘 구축됐느냐가 반도체 시장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다.
-반도체 R&D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텐데. 어떤 사례들이 있나.
▲최근 고객사와의 협업 프로젝트는 모두 중장기로 기획되고 있다. 결국 미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의미다. 과거에는 어플라이드코리아가 고객사에 설치한 장비의 유지보수, 기술 지원이 주력이었는데, 이제는 다수의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어플라이드 본사 및 연구소와 지속 논의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한국 고객과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혁신한 것을 어떻게 더 혁신할까'를 고민하고 있다.
또 지난해 11월 싱가포르에서 출범한 EPIC 센터가 사례가 될 수 있다. 첨단 패키징에 집중해 고객사와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한 일종의 플랫폼이다. 협업 모델이 가장 중요한데, 장비 제조업체, 재료 공급 업체, 반도체 제조사, 연구기관 등과 협력해 마이크로 범프·실리콘관통전극(TSV)·실리콘 인터포저와 같은 첨단 기술을 대응할 예정이다.
한국 R&D센터도 설립 준비 중이다. 한국 고객사들과의 협업이 기대되며, 단순 연구소를 넘어 한국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는 글로벌 혁신 허브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플라이드 역시 자체적인 협력 생태계 구축, 생태계 조성에 노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플라이드는 한국에서 직접 장비를 제조하지 않지만, 강력한 공급망관리(SCM) 체계를 갖추고 있다. 많은 양의 소재·부품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어플라이드가 반도체 장비를 설계하면 협력사들과 핵심 소재와 부품을 완성하는 형태다. 이 때문에 이같은 소재·부품 협력 공급망이 얼마나 잘 육성됐느냐가 중요하다. 건강한 에코시스템을 만드는 수 있기 때문에 단순 부품 조립을 넘어선 의미가 있다.
어플라이드가 직접 소재·부품 협력사를 발굴·투자하기도 한다. 2017년 2500만달러로 1차, 2022년 2500만달러 2차 펀드를 만들어 스타트업과 중소 협력사의 신기술에 투자하고 있다. 어플라이드와 협업하면서 기술을 고도화하고 또 어플라이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윈윈' 전략이다. 최근에는 반도체 뿐 아니라 성장잠재력이 큰 다양한 정보기술(IT) 분야에서도 새로운 기업을 발굴하고 있다.
-기술 경쟁력은 결국 인재에서 나온다. 최근 반도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력 확보가 중요 과제가 되고 있다.
▲핵심은 반도체 공정 단계(스텝)이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보통 1000단계 공정을 거쳐 제조되는 것이 일반론이다. 하지만 2나노미터(㎚)로 가면 2000단계에 육박한다고 한다. 공정이 더 많이 늘어나고 복잡해지면서 사람도 더 필요해졌다. 반도체 산업 전반의 문제다. 기술 성장 속도 대비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다.
어플라이드코리아도 자체적으로 인력을 지속 늘리고 있다. 작년에도 세자릿수를 뽑아 현재 2300명에 육박한다. 사내 교육 제도를 활용, 인재의 역량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미국 본사에서도 교육을 받기도 한다.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과의 관계도 견고히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대학과 다양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인공지능(AI)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어플라이드를 포함한 소부장 업계에서는 AI가 어떤 영향을 주는가.
▲AI는 반도체 장비 업계 혁신적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특히 고성능 AI 칩에 대한 수요 증가와 함께 새로운 기술과 장비 필요성이 요구된다. AI가 첨단 공정 도입을 주도하고 있고, 이에 따라 반도체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력 소비도 크게 늘었다. 어플라이드가 강조하는 반도체의 '전력·성능·크기·가격·시장출시기간(PPACt)' 개선도 더욱 강조되고 있다.
어플라이드에는 액셔너블 인사이트 액셀러레이터(AIx) 플랫폼이 있다. 이 플랫폼은 실시간 데이터 분석과 수백만개 측정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천개의의 공정 변수를 최적화한다. 이를 통해 PPACt 요소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AI 기술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 데이터 분석에 그치지 않는다. '행동 가능한 통찰력'을 제공하는게 중요하다.
또 AI 시대는 전력 관리가 반도체 업계 핵심 과제가 됐다. 챗GPT와 같은 모델을 훈련 시키는데 필요한 컴퓨팅 자원이 지난 5년동안 만배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에너시 소비는 250배 늘었다. 어플라이드도 이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신 기술과 통합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루테늄(Ru)이라는 새로운 원소로 배선 저항을 낮춰 전력 소모를 25%까지 줄이는데 성공했다.
-AI는 한국이 주력으로 하는 메모리 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향후 시장을 어떻게 전망하고 어플라이드는 어떤 대응 전략을 세웠는가.
▲메모리 시장도 AI로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했다. 고대역폭메모리(HBM)이 AI 시대 핵심 메모리로 자리잡으면서 시장 성장 동력이 완전히 바뀌었다. 앞으로 이같은 메모리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본다. AI 모델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서비스가 확장돼 고성능 메모리 수요를 견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플라이드는 메모리 제조사가 더 높은 성능과 용량의 HBM을 개발할 수 있도록 혁신 솔루션을 제공할 것이다. 특히 한국 고객에는 맞춤형 솔루션을 지원해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돕고 차별화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박광선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 대표는 1969년생으로 1994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에 입사했다. 기술 지원, 영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으며 탁월한 성과를 발휘해왔다. 2016년부터 삼성 사업부를 총괄하며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22년 10월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코리아 대표 겸 지역 총괄자로 선임됐다. 박 대표는 반도체 업계에서 쌓아온 풍부한 경험과 고객 대응으로 한국에서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사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고객인 반도체 제조사의 칩의 성능·전력·크기·비용·시장출시기간(PPACt)을 개선하도록 지원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