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시] 참 빨랐지 그 양반... 죽는 거까지 남보다

2025-10-22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풍자와 해학조차 용납하지 않는 세상은 너무 삭막

이정록 시인 백영욱 그림 곁들여 그림책 발간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이정록 시 '참 빨랐지, 그 양반'(이정록 글·백영욱 그림, 그림책 '참 빨랐지, 그 양반'중에서. 문학세상)

이정록 시인의 시 '참 빨랐지, 그 양반'은 웃다가도 가슴 찡하게 만드는 시다. 화자는 남편을 '그 양반'이라고 부르며, 함께했던 세월의 풍경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그 양반은 세상 누구보다 모든 게 빨랐다. 남들보다 먼저 오토바이를 사고, 달리기 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사랑도 결혼도 번개처럼 해치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빠름은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져, 세상과의 이별마저 남들보다 서둘러 버리기까지 했다.

사랑이 막 시작되던 순간의 설렘과 들뜸은 세월이 흐르며 잦아들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부재가 남긴 애틋함이다. 그 양반의 삶이 비록 사랑도, 이별도, 심지어 죽음마저 남들보다 빨랐지만, 절대 가볍지 않았음을. 그 빠름 속에는 누구보다 뜨겁고 깊은 사랑과 묵직하게 쌓인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스며 있었음을. 독자들은 안다.

가벼운 성적 농담조차도 쉽게 하는 게 어려운 세상이다. 풍자와 해학이 자칫 조롱과 비난으로 둔갑하여 지탄받을 수도 있다. 풍자와 해학 혹은 코미디가 죽은 세상은 얼마나 삭막한가. 모두가 조금씩 너그러워 질 일이다. 한 발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다 '찰나'의 일이다. oks34@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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