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장호의 사자성어와 만인보] 촌철살인(寸鐵殺人)과 나대경(羅大經)

2025-10-20

이번 사자성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마디 촌, 쇠 철, 죽일 살, 사람 인)이다. 앞 두 글자 ‘촌철’은 ‘약 3cm 길이의 쇠붙이’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다’란 뜻이다. 이 두 부분이 합쳐져 ‘아주 짧은 쇠붙이로도 사람 목숨을 얼마든지 뺏을 수 있다’란 의미가 만들어졌다. 직접적인 살인보다는 ‘무언가의 핵심은 그 크기가 아니고, 정교함과 날카로움에 달려있다’란 비유적 의미로 여러 상황에 쓰인다. 요즘엔 ‘짧은 말로 상대의 정곡을 찌르다’란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남송(南宋) 문인 겸 유학자 나대경(羅大經. 1196~1252)의 수필집 ‘학림옥로(鶴林玉露)’에서 유래했다.

나대경은 지금의 장시(江西)성에서 태어났다. 호는 유림(儒林) 또는 학림(鶴林)이다. 30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정의 권력 암투에 연루되어 면직당했다. 이후 그는 벼슬에 뜻을 접고, 평생 저술 활동에 힘썼다.

그의 대표 저서는 ‘학림옥로’다. 갑·을·병 3편, 총 18권으로 구성된 시와 문장에 대한 평론집이다. 흥미로운 일화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런저런 인물평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누군가 수레에 무기를 가득 싣고 와서 휘둘러봐야, 과연 그가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나는 약 3cm 길이의 짧은 칼로도 얼마든지 사람의 목숨을 뺏을 수가 있답니다.”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이 어록도 ‘학림옥로’에 실려있다. 종고는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고승이다.

‘촌철살인’은 바로 종고 선사의 이 자신감 가득한 어록의 끝 구절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살인’은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 ‘선(禪)불교의 최고 경지로 이끌거나 도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대체로 말이 많아지면, 핵심이 흐트러지기 쉽다. 말과 문장이 간결하면, 뭔가 세련된 느낌을 준다. 울림도 더 오래 지속된다. 동서고금에 ‘촌철살인’ 관련 어록들이 풍부한 이유다.

글이 간결하기로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이 유명하다. 난해한 도가(道家) 철학을 물, 여성, 아이 등에 비유해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짧은 문장들이 자연스럽고,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일본에도 ‘하이쿠(排句)’라는 짧은 운문(韻文) 장르가 있다. 조동종(曹洞宗)의 승려 료칸(良寬. 1758~1831)의 작품들이 유명하다. ‘오늘이라는 바로 이날 이 꽃의 따뜻함’ 꽃에 대해서는 이렇게 온기(溫氣)를 드러내 노래했다. ‘뒤를 보여주고, 앞을 보여주고, 떨어지는 단풍’ 낙엽에 대해서는 이렇게 심플하면서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혹시 내가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봄의 꽃, 여름의 두견, 그리고 가을의 단풍이라네.’ 그가 친동생에게 남긴 이 유언에서도 군더더기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겨울은 깔끔하게 생략해 아쉬움과 궁금증을 남기고 있다. 그는 평생 청빈과 무소유를 실천했다.

서유럽 문인 가운데,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 겸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가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짧은 문장을 많이 남겼다. ‘누군가는, 어디에 가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또 누군가는,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비로소 행복이 만들어진다(Some cause happiness wherever they go; others whenever they go.’ 지나치게 통렬한 느낌이지만, 그의 이 짧은 문장도 꽤 많이 회자된다.

AI(인공지능) 시대다. 삶은 과거보다 더 분주하다. 마치 수레에 가득한 시끄러운 무기들처럼 지식과 정보뿐만 아니라 재밋거리도 도처에 넘쳐난다. 이 와중에도 만약 누군가 가슴에 와닿는 약 3cm의 예리하게 빛나는 쇠붙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는 행운아다. ‘촌철살인’은 평정심의 오랜 벗이기 때문이다.

‘학문 분야에선 많이 아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學不必博), 무엇보다 쓸모가 있어야 한다(要之有用). 관료 생활에선 승진이 최우선이 아니고(仕不必達), 무엇보다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要之無愧). ‘학림옥로’에 실려있는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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