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결의 불가능성

2024-12-11

1361년(공민왕 10)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수도 개경까지 함락될 처지가 되자, 공민왕과 관료들은 다급히 피란했다. 임금이 성의 동문을 나설 때, 개경 사람들도 앞다투어 빠져나갔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챙기지 않았다.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바닥에 엎어지고 자빠지며 깔리고 짓밟혔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가득한 아수라장 속에서 국왕은 물론이고 비빈들까지 말을 타고 허덕대며 소백산맥을 넘어 안동까지 피란했다. 이듬해 정월 수복될 때까지, 개경에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홍건적은 사람을 잡아먹고 임산부의 젖을 잘라 구워 먹었다. 정월의 전투는 또 얼마나 치열했던지. 눈비가 몰아치는 속에 동틀 녘부터 해 질 녘까지 전투를 하고서야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홍건적의 침입은 개경에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개선한 장수들도 남아나지 못했다. 장수 사이의 분란으로 대장이 살해당했고, 대장을 살해한 장수들도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새로운 위기가 계속 휘몰아쳤다. 북쪽에서 나하추가 쳐들어왔고, 제주도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홍건적이 재침한다는 소문도 흉흉했다. 그런 와중에 원나라에서는 새 고려 국왕을 세우고, 공민왕은 내부 반란으로 죽을 위기를 넘겼다.

1363년 음력 3월, 전란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매장하고, 한 달 후 임금이 개경에 돌아왔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신 책봉은 그로부터도 7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 전란의 수습에 꼬박 2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죽은 장수에 소속됐던 장졸들은 그 명단에 들 수 없었다. 이때 공을 세웠으나 끝내 처형당한, 어떤 장군의 열 살배기 아들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됐다. 모든 면에서 제대로 수습되지 못한 병란이었다.

약 한 세기 후인 조선 세조대, 한때의 신동 김시습이 개성을 여행하고 그 견문을 바탕으로 훗날 소설 ‘이생규장전’(<금오신화>에 수록)을 쓴다. 주인공은 공민왕대 개경의 소문난 선남선녀, 이생과 최랑. 열렬한 사랑 끝에 혼인한 이들은 홍건적 침입으로 그 알콩달콩한 일상을 박탈당한다. 양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최랑 역시 저항하다 살해당한다. 혼자만 도망쳐 살아남은 이생은 귀신이 된 최랑을 만나,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몇년간 함께한다. 그러나 최랑은 결국 죽은 자의 세계로 떠나고, 이생은 그 시신을 수습한 후 얼마 안 가 숨을 거둔다.

두 달 전, 고려 말 여러 전란의 수습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이생규장전’이 공민왕대 개경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생의 마지막은 사실 그들의 소망이 아니었을까. 죽임당한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아 제대로 안장하고, 귀신으로라도 다시 만나 떠나보낼 마음의 채비를 갖추는 것. ‘당신의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는’(<소년이 온다>), 그 처절한 고통을 겪은 이들이 품었을 최소한의 바람.

그 논문을 쓰다가 권근(1352~1409)의 글에서 홍건적의 침입 때 공을 세운 박강과 배득유라는 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시던 장군의 죽음으로 제대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후 왜구가 침입하면 분연히 전투에 나서 공동체를 보호했으며, 지방 행정을 할 때면 시시비비를 강직하게 가려내 온 고을을 안정시켰다. 시골에서 이름 없이 살며 자손도 빈한해졌으나, 모두 그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탠 작은 영웅들이었다.

663년 전 전란의 피해자와 숨은 영웅들의 이름을 2024년의 논문에 불러오며, 역사학을 하는 행위의 의미를 곱씹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 구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한. 잊지 않고, 잊히지도 않는 한. ‘우리’는 척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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