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과거는 살아 있는 현재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12월에 일어났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그러한지 시공여행을 떠나보자.
먼저 전인권 등 공저, 《1898, 문명의 전환》 218쪽에는 1898년에 한양의 거리를 달군 만민공동회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만민공동회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하나의 ‘국민’임을 경험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장작불을 피워놓고, 장국밥을 먹으며, 기생에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쏟아놓았고 직접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품과 돈을 제공함으로써 시위대에 동조를 표했다. 수많은 말이 넘쳐나는 현장을 각 신문들은 다투어 ‘중계’했고, 신문에 실린 뉴스는 때로는 소문으로 그리고 때로는 풍문으로 대한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은 1898년 11월 26일 자 <독립신문>이다.
수하동 소학교 학도 태억석, 장용남 두 아이는 나이가 십이삼인데 만민공동회에 다니면서 충애 의리로 연설하였는 고로, 옳은 목적 가진 이들은 그 두 아이를 칭찬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는지라. 지금 들리는 이야기로는 학부대신 이도재씨가 그 학교에 훈령하여 그 학동들을 퇴학시키고 그 학교 교원을 감봉시켰다 하나…... 학부대신이 그 학교 교원과 그 학동들을 더욱 포상하여 권면하지는 못할지언정…..
이를 보면 1898년의 만민공동회가 2024년의 대한민국을 미리보기 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장작불이 촛불을 거쳐 응원봉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말이다. 한데 그 옛날의 시위가 지금보다 앞선 면도 있다. 십대 초반의 소년들이 이렇게 활약했으니까
그런데 벼랑 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다. 그 경위는 이러하다.
1898년 12월 고종은 무력 진압을 저울질한다. 군대 동원에 대한 외국 외교관들의 반응을 타진해 본다. 서양 외교관들은 대체로 반대다. 일본특명전권공사 가토 마스오는 다르다. 그는 12월 15일 오후 1시와 18일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저희 일본에서도 유신 초기에 병력으로써 민회를 압제한 일이있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한다. 무려 3시간 동안 알현하면서 그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규탄하였다. 놀라운 일은 조선 정부의 수구파들이 가토 마스오에게 비밀리에 20만 원의 뇌물을 미리주어 그렇게 말하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이다.(신용하, 《독립협회연구》(하), 621쪽).
고종은 가토의 장광설을 듣고 내심 매우 기뻐한다. 마침내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고 수구파는 반격에 나선다. 12월 23일 무력 탄압이 시작된다.
대대장 김명제는 부하 장병들에게 3원씩을 나누어 주고 술과 음식을 먹인 다음 시위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한다.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2명의 병사가 만민공동회로 뛰어들어 지지 연설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때 병정들이 시위대를 포위하여 총검으로 위협하며 들이닥친다. 마침내 무력 진압이 개시된 것이다. 시위대는 분분히 다른 집회 장소로 이동한다. 그 후미를 병사들이 포위하여 공격한다. 상당수의 시민이 다친다. 동원된 보부상들은 “밟아라”, “잡아라”, “쳐라”, “좇아라”라를 외치며 광기를 부린다. 밤이 깊어간다. 사람들은 분한 마음을 누르며 발걸음을 돌린다.
다음 날 12월 24일은 완전히 계엄상태로 들어간다. 총검을 든 병사들이 요인들을 체포, 구금한다. 12월 25일 마침내 고종 황제가 11가지 죄목을 들어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령한다. 이틀 뒤인 12월 27일 자(양력) 《조선왕조실록》은 한 단어만을 기록하고 있다. “지진(地震)”.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망국의 전조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나라가 없어질 것이라는.
그로부터 126년 뒤인 2024년 겨울 다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다시 수구파들의 광기 어린 반격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12월 27일 다시 지진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환호성이 터질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