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것을 멈추었다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다. 부고를 읽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변화시킨 사람들의 흔적을 일깨워준다."
미국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 남긴 말이다. 다사다난 2024년에도 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프랭클린의 말을 빌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이름을 남긴 국내외 10인이 남긴 이야기를 모았다. 활동했던 분야, 지향했던 방향은 다르지만,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제각기 분투했다는 점은 같다. 게재 순서는 별세 일자 기준.
민간 경제외교관, 기업인 조석래
효성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일으켜 세운 고인의 별명은 '조 대리'였다. 현장을 꼼꼼하게 직접 챙기고 실무까지 살핀다는 의미에서다. 신혼여행지를 고를 때도 현지에서 기술 연수를 받을 수 있는지를 따졌다고 한다. 그의 이런 집념은 2011년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고성능 탄소섬유의 국내 최초 개발 등 다양한 성과로 이어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부터 한미경제협회 등 다양한 국내외 경제단체에서 회장을 맡으며 민간 경제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7년이 지난 올해 3월 29일 숙환으로 영면했다. 89세.
'빠리의 택시 운전사', 작가 홍세화
'세계 평화'를 줄여 만든 이름을 가진 고인은 20년 간 프랑스에서 망명자로 살았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연루되면서다. 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가 쓴 책,『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책에서 그가 강조했던 개념은 '똘레랑스(toléranceㆍ관용)'. 그는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며 '다름'이 '틀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귀국 후엔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며 정계에도 몸담았다. 벌금을 못 내 노역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무이자 대출을 해주는 ‘장발장은행’도 설립했다. 4월 18일에 숨을 거두기 며칠 전 마지막 언론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말은 "이젠 자유롭다"였다. 77세.
자나깨나 나라 걱정, 정치인 노재봉
자나깨나 나라 걱정이 먼저였던 꼿꼿한 관료이자 학자, 정치인이다. 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7년 6월 항쟁 중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자문을 맡으면서 직선제 개헌이 담긴 6·29 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다. 이듬해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대통령실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정계 입문했고, 1990년엔 대통령 비서실장, 이듬해엔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혈액암 투병 중에도 "기적의 대한민국이 자칫 멈출까 봐 안타깝다"고 주변에 토로하곤 했다고 한다. 4월 23일 별세했다. 88세.
아침이슬·지하철 1호선, 가수 김민기
'아침이슬' 등 저항의 아이콘이 된 노래를 지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등을 결성하며 '운동권 가요의 대부'가 됐다. 그의 많은 노래가 금지곡이 됐다. 정작 그는 1998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운동을 염두하고 만든 노래는 없다"며 "내 노래가 그들을 위로했다면 다만 영광"이라고 말했다.
김민기를 상징하는 또다른 단어는 학전. 그가 1991년 대학로에 설립한 이 극장은 수많은 신인 배우와 작가의 요람이 됐다. 그가 제작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2023년까지 8000회 이상 공연되는 역사를 썼다. 그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김민기가 없으면 학전도 없다"는 말과 함께 학전은 지난 3월 폐관했다. 1951년 태어난 고인은 7월 21일 영면했다. 73세.
트로트 4대 천왕, 가수 현철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 봉선화라 부르리"라고 시작하는 노래, '봉선화 연정'으로 유명한 트로트 가수 현철(본명 강상수)은 20년 가까이 '이름 없는 가수'로 살았다. 동아대 경영학과 수석 입학까지 했지만 자퇴하고 1969년 가수로 데뷔했다. 그러나 '봉선화 연정'이 히트한 1988년까지 십수년을 설움의 무명 시절을 견뎌야 했다. 생계를 잇기 위해 기획사에 취직해 다른 가수들을 홍보하는 일을 하면서도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다. 밴드를 결성하고 앨범을 계속 낸 도전의 결과, 송대관ㆍ태진아ㆍ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인기를 구가했다. 7월 15일 별세했다. 82세.
눈으로 말하다, 농구인 박승일
2m 2cm의 장신으로 농구 코트를 누비던 고인은 2002년 코치 생활로 인생 2막을 열자마자 절망에 스러졌다. 근육이 퇴화하며 온몸이 굳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ㆍALS) 진단을 받으면서다. 병세 악화 속도는 속절없이 빨랐고, 결국 안구를 제외하곤 몸의 모든 기능이 멈췄다. 하지만 그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꿨다. 미세한 눈꺼풀 움직임을 포착하는 안구 마우스를 이용해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중앙일보가 2005년 1면에 게재한 안구 마우스 인터뷰에서 "나 여기 살아있다"고 전하는 그의 눈엔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그의 뜻으로 설립된 승일희망재단은 루게릭병 환우의 아픔을 알리는 데 앞장섰고, 가수 션과 함께 설립한 루게릭병 요양병원은 10월 완공됐다. 고인은 병원 완공을 목전에 둔 9월 25일, 긴 투병을 끝내고 영면에 들었다. 53세.
회사원에서 국회부의장까지, 정치인 이상득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지난 10월 23일 별세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후 코오롱 1기 신입 공채로 입사해 대표이사직에 오르며 동생과 더불어 '흙수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다. 정계에 입문한 것은 1988년으로, 2008년까지 내리 6선을 하며 국회부의장과 한나라당 최고위원·원내총무·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 국익을 위해서 여야를 넘나드는 광폭 행보도 보였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야권에 협조를 구하자 법안 통과 등에서 앞장선 것이 대표적이다.
동생의 청와대 입성을 위해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을 발휘해 '친이'계를 키워냈다. '상왕' 등 부정적 수식어도 따라다녔다. 동생의 대통령 당선 뒤엔 국회의장의 꿈을 접고 자원 외교에 힘썼다. 금품 수수 등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지병으로 10월 23일 영면했다. 89세.
영원한 일용엄니, 배우 김수미
영원한 '일용엄니' 배우 김수미는 29세부터 할머니 역을 맡았다. 1980년부터 인기리 방영했던 국민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에서다. 그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어린 나이에 할머니 역이라니, 화도 났지만 오기가 생겨 시장에 가서 할머니들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오기는 인기로 이어졌고, 백발 쪽머리 '일용 엄니'는 그의 인생 캐릭터가 됐다. 1970년 데뷔 후 10년 만에 얻은 인기였다.
이후 특유의 걸쭉한 사투리를 트레이드마크로 '욕쟁이 할머니'로 활약했다. 요리 실력도 뛰어나 김치와 게장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도 설립했다. 그는 지난해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18세에 떠나보낸 엄마 손맛이 그리워서 요리하기 시작한 것이 사업이 됐다”고 털어놨다. 그의 삶은 그러나 상처도 많았다. 그가 1983년부터 썼던 일기를 모은 유작 에세이에서 그는 자살 시도와 빚 독촉, 소송 등에 시달렸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10월 25일 고혈당 쇼크로 숨을 거뒀다. 75세.
다이소 창업자,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
100엔(약 928원)으로 쇼핑을 할 수 있는 점포의 대명사, 다이소를 창업한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는 한때 빚더미에 앉아 야반도주까지 했던 인물이다. 처가의 방어 양식업을 물려받았으나 3년만에 부도를 냈고, 500만엔의 빚을 남기고 도망쳤다. 이후에도 하는 사업마다 실패했지만 부도에서 그는 기회의 싹을 틔웠다. 부도를 낸 회사들의 생활용품을 모아다 트럭에 싣고 다니며 저렴하게 판매하면서다. 100엔숍의 시작이었다.
당시 그는 사업이 바빠지면서 가격표를 구별해 붙이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로 모든 상품을 100엔에 파는 전략을 채택, 성공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1972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시작한 '야노 상점'은 다이소로 개명하고 오늘날에 이른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버블 경제가 붕괴하고 장기 불황이 시작된 건 야노 회장에겐 호재였다. 2001년 대만 진출로 해외로까지 발을 넓혔고, 현재 일본 국내외 5000여개 매장을 운영하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젊은 시절 권투선수를 꿈꿨던 그의 사인은 심부전. 80세.
일본 언론계 거목, 와타나베 쓰네오(渡辺恒雄)
와타나베 쓰네오(渡辺恒雄)는 저널리스트이면서 신문사 경영에서도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1950년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한 그는 정치부 기자로 이름을 날리며, 정계 거물과 교류하고 여론 흐름을 이끌었다. 정치부장과 논설실장 등 요직을 거친 뒤 1991년 사장 겸 주필에, 2004년엔 그룹 회장직에 앉아 1인자로 군림했다.
그가 평기자 시절 만년 2위였던 요미우리는 그의 사장 재임 중 발행 부수 1000만부를 돌파하며 1위 입지를 굳혔다. 그는 뚜렷한 보수 성향이면서도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양심적 언론인으로도 목소리를 냈다. 전범자가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대해 "침략한 가해국과 침략당한 피해국의 정치적 상징"이라며 참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폐렴으로 12월 11일 별세하기 수일 전까지도 병상에서 후배들의 신문 칼럼 원고들을 점검했다는 후문이다. 9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