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배터리 산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첨단 제조업이자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산업의 핵심이다. 하지만 최근 열린 모 콘퍼러스에서 발표된 국내 배터리 기업 임직원의 발표를 들어보니, 기술전략이 여전히 모호하고, 기술개발 속도가 경쟁국가에 비해 둔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기술 수준과 별개로, 미래 수익성을 평가하는 투자자와 자산평가기관 입장에서 걱정스러운 문제다.
가장 큰 아쉬운 점은 기술 포트폴리오의 편중이다. 한국 기업들은 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와 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성능 일변도의 전략은 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중국 기업들은 리튬·철·인산과 소듐 이온 배터리를 앞세워 저가형 전기차, 에너지 저장장치 시장을 선점하고 있고, 일본 기업들은 고체전지를 항공과 프리미엄 전기차 분야로 명확히 분할해 상용화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뒤늦게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내놓았지만, 여전히 시장의 수요군과 기술을 대응시키는 전략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상용화 일정의 불확실성이다. 모 업체는 전고체 배터리의 비전은 강조하면서도 구체적인 시기, 시장, 수익화 계획에 대해 매우 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투자자 입장에서 기술 개발이 향후 돈을 벌 수 있는 투자로 보기보다는 지속적인 비용이자 불확실한 리스크로 인식될 수 있다. 경쟁기업은 이미 소듐이온이나 반고체 배터리의 실증과 양산을 병행하고 있어, 수익화 일정이 뚜렷하다.
세 번째, 기술 개발 '속도' 그 자체가 걱정이다.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소재 조성, 공정 설계, 수명 예측에 이르기까지 연구개발(R&D) 주기를 단축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개발 속도와 비용 측면에서 명시적으로 경쟁력이 있음을 투자자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술 수준이 아무리 높더라도, 투자자가 원하는 것은 시장에 도달하는 속도와 그 결과의 수익화 가능성이다. AI 기반 R&D 체계의 내재화를 통해 소재 설계, 수명 시뮬레이션, 고장 예측, 공정 최적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 R&D 주기를 줄이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며, 불확실성을 줄이는 노력을 시장에 보여줘야 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몇 가지 구체적 보완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 시장화가 임박한 기술들을 조기에 상용화할 수 있도록 파일럿 라인을 가동하고, 해당 기술을 적용할 시장군을 명확히 지정해 기술개발이 곧 매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호를 시장에 줘야 한다. 그리고 중기적으로는 전고체, 리튬황, 차세대 리튬메탈 배터리를 용도별로 구분해 구체적인 매출 목표와 적용 로드맵을 시장에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AI는 단순한 연구 도구가 아니라 미래 경쟁력의 핵심 기반으로 인식해야 한다. 단지 '배터리 셀을 잘 만드는 기업'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배터리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실험실이나 생산라인에서 AI 도입에 대한 우려와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술 전략 상위 단계에서 기획, R&D, 구매, 생산을 아우르는 AI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ESG와 글로벌 지정학, 핵심광물의 공급망 안정성을 고려한 소재·재료 전략에서 통합된 시야가 필요하다.
기술이 고도화 되더라도 투자자는 기술이 시장에서 실현되는 전략과 실행의 증거를 원한다. K배터리가 다시 세계 시장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는 더 나은 기술뿐 아니라, 그 기술을 뒷받침할 전략, 속도, 실행력, 핵심광물 관리 능력을 시장에 보여줘야 할 때다.
박용진 KIS자산평가 ESG사업본부장 yongjin.park@kisprici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