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권 위험관리책임자(CRO)의 역할이 실무 총괄 관리에서 은행 경영 전반을 떠받치는 핵심 방파제로 격상되고 있다. 잇단 금융사고에 미국발 관세폭탄까지 터지면서 위험관리 역량이 생존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은행권 전반에 보수적 여신 운용과 철저한 리스크 통제 기조가 강화되며 CRO에 더욱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지난 4일 미국의 상호관세 부과와 대통령 파면으로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주요 금융지주는 긴급회의를 열고 위기관리 방안을 논의했다. 은행들은 수출 기업을 비롯한 기업대출 부실 위험이 커질 것으로 보고 산업별·차주별로 관세 영향 분석에 착수했다.
구본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제2기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한층 강화되면서 은행을 비롯한 금융산업에 구조적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국내 은행산업은 보호무역주의 장기화에 따른 리스크와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중장기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안정적 은행 경영 핵심 키 CRO···행장 하마평 오르기도
과거 영업 일변도의 조직 문화 속에서 은행의 리스크 관리 부서는 부수적 역할에 머물렀다. 하지만 최근 대내외 경영환경이 지속적으로 악화되면서 은행 경영의 방파제로 불릴 만큼 중요성이 커졌다.
국내 은행별 CRO들은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입지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은행이 차기 행장 롱리스트에 리스크관리 전문가인 박장근 리스크관리그룹 부행장을 올린 게 대표적이다.
지난 2007년 리스크총괄부 부부장 자리에 앉은 박 부행장은 2016년 리스크총괄부 부장, 2020년 본점영업부 본부장을 거쳐 2023년 3월부터 우리은행의 리스크관리그룹을 이끌고 있다. 박 부행장은 지난 7일 열린 상호관세 피해 지원 TF' 회의에 임종룡 회장, 정진완 우리은행장과 나란히 등장해 존재감을 알리기도 했다.
신한은행도 지난해 1월 나훈 리스크총괄부장을 상무(리스크관리그룹장)로 승진시켰다. 당시 신한은행은 1999년부터 리스크 분야 전문성을 쌓은 나 상무가 은행 전체 경영 이슈에 다양한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KB국민은행도 지난해 말 임원인사에서 박영진 상무를 승진시키고 CRO로 임명하며 리스크 관리조직에 힘을 실었다.
CEO에 '직보'하는 CRO···전략적 역할 대폭 강화
글로벌 회계·컨설팅그룹 딜로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금융기관에서 CRO가 최고경영자(CEO)나 이사회에 직접 보고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CRO와 독립적인 리스크 관리 부서는 전사적 리스크 관리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전략 수립 등 전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 CRO가 거버넌스·경영전략·기술의 중심 축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경영컨설팅그룹 올리버 와이만은 지난해 11월 보고서를 내고 2023년 지역은행 위기 이후 은행 산업이 구조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CRO의 전략적 역할이 대폭 강화됐다고 분석했다. 은행들이 더 빠르고 복잡한 리스크 환경에 맞는 탄력적인 CRO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게 보고서의 핵심내용이다.
올리버 와이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미지역 은행 CRO 177명 가운데 93%가 은행산업의 리스크 확산속도가 빨라졌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들은 리스크 관리를 위해 유동성, 자본 등에 대한 규제당국의 감독이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금융당국도 은행권 리스크 관리체계 개선에 발벗고 나섰다. 올해 1월부터 책무구조도가 시행되면서 CEO-감사-준법감시인-CRO 등 경영진 각각의 책임 범위가 명확히 규정됐다. CRO의 권한이 커지면서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졌다는 얘기다.
은행권 관계자는 "CRO의 역할은 이제 단순한 리스크 관리를 넘어 은행의 경영 전략과 직결되고 있다"며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서 CRO의 선제적 대응과 보수적인 리스크 관리가 향후 은행 건전성을 지키는 핵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