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의사결정은 복잡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고 권력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의 의사결정은 경쟁 조직들의 첨예한 다툼을 거쳐 이뤄진다. 필자가 평양에 대사로 근무할 당시에도 극한 경쟁 구도를 목격했다. 외국인이 북측에 자금을 지원하는 외화 냄새만 있어도 서로 다른 조직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리셉션 행사에서 만난 북한군 간부들은 “영국 대사관이 프로젝트 파트너로 잘못된 (북측) 조직을 골랐다”고 분개하며 자신들과 손잡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외국 기업인들이 북한의 한 조직과 협상이 잘 진행돼 평양에 도착했더니 전혀 다른 조직이 기존 조직을 밀어내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례도 들었다. 이처럼 북한 정권 내부에서 조직들의 경쟁은 단순히 혼란만 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염소나 돼지를 과수원에서 방목하는 경우가 많다. 떨어진 과실 처리에 염소나 돼지가 제격이어서 과수원 주인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과수원은 농업부가, 가축은 가축부가 담당하는데 두 부처는 이 부분에서 협력하지 않는다.
조직끼리 과도한 경쟁과 다툼
외국 관광객 등 비자 막판 취소
보안기관 개입으로 망신 자초

최근에는 힘이 막강해진 보안 부처(사회안전성)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한 이념·사상 오염을 경계해 다른 부처의 정책에 걸핏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북한의 외국인 정책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를 보면 이런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코로나19 사태로 평양을 떠났던 국제기구와 유엔 인력 및 각국 외교관들의 북한 재입국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북한에서 빚어진 혼선이 좋은 사례다. 2024년 2월 말 폐쇄 상태이던 평양 주재 독일 대사관을 시작으로 북한은 코로나19 이후 외국인 재입국을 허가하겠다는 신호를 줄곧 보냈지만, 정작 관련 비자 승인은 한 건도 없었다. 결국 스웨덴과 폴란드가 2024년 9월과 11월에 각각 재가동될 수 있었을 뿐이다. 평양 주재 일부 유엔 기구는 북한인으로 구성된 현지 직원들만으로 기능을 유지하는 형편이다.
이런 현상은 북한 부처들의 경쟁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평양 주재 외국 기관의 재가동 사안은 외무성이 취급했겠지만, 외국인의 평양 주재에 부정적인 보안 기관이 관련 절차에 개입해 중단시켰을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 스포츠 관계자, 기업인들의 북한 단기 방문을 놓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 2월 서방 관광객 13명의 나선 방문이 허가됐지만, 3월 5일 돌연 중단됐다. 여행사들은 당황하고 실망했다. 아마도 북한 관광 당국은 외국인 관광객 유입을 통해 외화벌이를 원했겠지만, 보안 기관의 개입으로 중단됐을 것이다.
지난 12~16일 예정됐던 ‘평양 춘계 국제무역박람회’의 경우 외국 기업인들에 대한 초청장과 비자가 차질 없이 발급돼 행사가 잘 진행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지난 5일 북한 당국이 갑자기 외국인 참석을 금지하며 비자를 취소했다. 이 박람회에는 서방뿐 아니라 200여 개가 넘는 중국·러시아 기업도 포함됐다. 북한 당국은 “국가 이익을 고려해 이런 결정을 했다”는 애매한 해명을 내놨다. 아마도 보안 기관이 많은 외국인이 평양에 몰려오는 것을 우려해 행사를 금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제무역박람회가 외국 기업의 참여 없이 진행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김정은과 푸틴의 관계가 밀착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막판에 비자를 취소했다. 지난 9일 김정은은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서 “위대한 조·로(북·러) 친선은 영구 불멸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갑자기 비자가 취소된 러시아 기업인들에게 김정은의 말이 얼마나 진실하게 다가갈지는 의문이다.
오는 8월 15일 북한에서 기념하는 ‘조국해방기념일’ 80주년 행사에 외국인 참가를 허용할지 주목된다. 주체사상의 해외 전파가 주요 임무인 조선친선협회(KFA)는 참가를 희망한다고 이미 밝혔다. 만약 북한이 해외의 친북 지지 세력인 이 단체에도 비자를 막판에 취소한다면 북한에 자해행위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북한 보안 기관은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비정상적인 의사 결정 행태는 국제무대에서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뿐만 아니라 북한에 우호적인 세력의 지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국 북한의 최대 적은 북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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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