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해운업계는 '녹색 전환'의 큰 흐름 속에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해운 부문 온실가스를 실질적으로 '제로'로 감축하기 위해 강력한 규제를 도입 중이다. 최근 IMO 환경보호위원회(MEPC) 제83차 회의에서는 연료 생산부터 소비까지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평가하는 '수명주기 평가(LCA)' 기준과 함께 선박운항탄소집약도(CII) 등급 기준이 강화됐다.
이에 따라 규제 대응이 가능한 선대(fleet)와 항로, 항만 운영이 해양국가 핵심 경쟁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주목받는 개념이 '녹색해운항로'다. 특정 국가나 항만 간 탄소중립 선박을 투입하고, 청정 연료 및 벙커링(연료공급) 인프라를 함께 구축해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는 항로다.
단순히 선박 교체를 넘어 항만 인프라, 연료 공급망, 선박 기술 개발, 제도 개선, 정책 금융이 결합하는 통합 해운 생태계 전환 전략이다.
녹색해운항로 개념은 2021년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영국이 주도한 '클라이드뱅크 선언'과 2022년 COP27의 미·노르웨이 공동 주도 등으로 공식화됐으며, 협의 중인 녹색해운항로는 2022년 22개에서 2024년 11월 기준 62개로 급증했다. 우리나라도 해양수산부를 중심으로 한·미 간 녹색해운항로 구축 세부 계획을 수립 중이다.
녹색해운항로 구축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청정 연료의 안정적인 수급이다. 그린메탄올·그린암모니아는 기존 화석연료 대비 5~7배 이상 비싸며, 국내 생산 인프라가 부족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이에 미국·호주 등 청정연료 생산국과의 전략적 협력이 필수다.
예컨대 부산항과 타코마·롱비치항을 연결하는 한·미 녹색해운항로 구축시, 미국 서부의 풍부한 바이오매스 자원을 활용한 그린메탄올 생산과 한국의 메탄올 기술이 결합하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또 한국과 호주는 기존 철광석 수출입 항로에 투입되는 선박 연료를 호주산 그린암모니아로 전환하고, 한국 암모니아 추진 기술을 적용해 녹색해운항로를 구축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2020년 '환경친화적 선박 개발·보급 촉진에 관한 법률' 시행 후, 정부·민간 노력으로 메탄올 추진선박 실용화에 성공했다. 암모니아 엔진이나 전기하이브리드 추진 기술, 풍력보조추진장치(WAPS) 등 다양한 친환경·탈탄소 기술도 개발 중이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도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서 유관 기관, 기업과 협력해 녹색해운항로 적용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2600톤급 '친환경대체연료 실증선박(K-GTB)'을 건조·운영하며 탈탄소 기술 해상 실증과 시장 진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녹색해운항로 구축을 위해서는 기술 개발 외에 다양한 제도·경제적 기반도 필요하다. 새로운 연료나 추진시스템을 다뤄야 하는 선박 승무원에 대한 재교육과 안전관리 절차 구성, 사고 대응 및 방제 체계 마련도 필수다.
또 해운선사 입장에서는 연료전환 보조금, 친환경 개조비 지원, 탄소세 기반 한국형 보조금 지급 체계 마련이 절실하다. EU는 배출권거래제(ETS) 수익으로 전용 기금을 조성해 보조금 지급, 인프라 확충, 기술개발에 재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운·조선 산업은 2024년 수출액이 870억달러로 반도체에 이은 2위를 기록했으며, 30만명 이상을 직접 고용할 수 있는 지역 균형 기반 산업이다. 녹색해운항로는 탈탄소 기술 데뷔 무대이자 세계적인 경쟁의 장으로, 해운·조선 산업 생태계 전환의 축이 될 것이다. 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 지역 소멸위기 극복을 위한 국가적 전략 과제로 녹색해운항로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강희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친환경해양개발연구본부장 hjkang@kriso.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