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22일 다시 워싱턴DC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16일(현지시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협상을 벌인 뒤 19일·20일 각각 귀국한지 이틀 만이다. 한국 정부의 협상 ‘키맨’들이 이같이 짧은 시차로 재출국한 것은 협상의 긴박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실장은 이날 출국 전 “많은 쟁점에서 양국 간 입장차가 좁혀졌지만, 아직 한두 가지 분야는 대립이 팽팽하다”며 “우리 국익에 맞는 타결안을 만들기 위해 서둘러 나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방미에서는 협상의 최종 타결을 위한 남은 쟁점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한국이 제안한 3500억 달러(약 490조원)에 달하는 대미 투자 패키지를 놓고, 미국은 그동안 ‘선불형’ 현금 투자를 고집해왔고, 한국은 외환시장 불안과 국내 재정 부담을 이유로 분할 투자 방식을 주장해왔다.
최근 협상에서는 양측이 대출과 보증을 포함하고 기간을 늘린 ‘단계적 분할 투자’ 방식으로 의견이 어느 정도 접근한 것으로 관측된다. 김정관 장관도 지난주 협상을 마친 뒤 “미국이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구체적인 현금 투자 비율과 투자처 결정 등 ‘투자 거버넌스’ 구조, 손실 분담(로스캡) 조항 등은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협상 결과에 따라 통화스와프 등 외환시장 안정 장치에 대한 세부 논의가 진행될 수 있다. 이번 협상에는 이를 담당하는 최지영 기획재정부 국제경제차관보가 동행한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요구 수준이 일본과 비슷하게 낮아졌지만, 손실 분담 구조나 거버넌스(투자 결정권) 등 핵심 세부 사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현금 비중을 최소화하고 단계적 집행 원칙을 확보하지 못하면 단기 외화 유출로 원화 변동성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중 현금 납입 비중이 30%만 돼도, 한국의 외환보유액 약 4200억 달러 중 4분의 1가량이 단기간에 소진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앞두고, 양국이 쟁점을 제외한 부분 합의 수준의 MOU(양해각서)를 체결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김용범 실장은 “쟁점이 남은 상태에서 특정 시점까지 합의된 내용만으로 MOU를 체결하는 것은 정부가 고려하지 않는다”며 “모든 쟁점이 정리된 뒤에 서명하겠다”고 강조했다. 내부적으로 APEC을 협상 데드라인으로 삼되, 정치적 이벤트를 위한 ‘불완전한 합의’는 피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다만 최종 타결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큰 틀의 합의 결과가 오는 29일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채택될 공동성명(Joint Statement)에 반영될 가능성도 있다. 한 통상전문가는 “쟁점이 APEC 전까지 해소되지 않는다면 공동성명 수준에서 원칙을 문서화하고, 이후 후속 협상을 통해 MOU로 이어지는 절차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APEC은 한·미 정상에게 외교적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중요한 무대다. 교착 상태에 빠졌던 한·미 협상이 급물살을 탄 것도 APEC을 앞둔 시점과 맞물린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다자 외교 무대에서 ‘트럼프 관세’의 성과를 부각할 수 있고, 한국도 이번 기회를 실리 확보에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이에 따라 이번 협상은 단순히 관세와 투자 문제를 넘어 원자력 협정, 방위비 인상 등 안보 이슈까지 포괄하는 ‘패키지 딜’로 확장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용범 실장도 “통상 협상이 완료되면 다른 분야까지도 대외적으로 발표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이번 협상은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의 주도권 확보와도 맞닿아 있다. 특히 조선·반도체·방산·AI 등 전략산업 분야의 대미 투자가 확정되면 향후 수년간 한국 대기업의 성장 전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청한 한 통상전문가는 “정부가 한국 기업이 강점을 가진 산업을 중심으로 투자처를 정하고, 그 기업들이 달러를 직접 조달해 투자하면 정부의 외환 소요를 줄이는 동시에 국내 기업 경쟁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막판 협상에서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상 타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사결정 특성상 최종 결정 전까지는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일본·한국·유럽과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관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관세는 국가안보이자 국부이며, 우리는 그것으로 수천억 달러를 벌었다”고 강조했다. 전날에도 “한국과 공정한 협정을 맺었다”고 밝히며 한·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가능성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