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한 장씩 찢어서 방에 넣어놨다고 가정해보죠. 그 방에 들어가 찢긴 페이지들을 다 읽었어요. 그럼 그 책을 읽은 걸까요? 맥락도, 순서도 없는 무의미한 정보들만 무수히 봤을 뿐이에요. 인터넷 공간은 페이지가 낱장으로 찢겨 돌아다니는 방이에요.”
‘책 대신 인터넷 서핑이나 유튜브 쇼츠로 여가를 보내는 게 뭐가 문제냐’는 질문에 김새섬 대표(46)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맥락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운영하는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이 최근 회원 수 1만3000명을 넘겼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한몫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믐’은 회원들끼리 자발적으로 독서모임을 결성하고 독서 토론을 하는 공간이다. ‘친목질’, ‘정치질’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모임은 29일 후엔 자동으로 해체된다. 다만 글은 남는다. 회원이 아니어도 플랫폼 내에 모든 글을 볼 수 있다. 수익은 일부 유료 독서 모임 운영, 중소 출판사나 재단 대신 독서 모임을 대행해주고 받는 수수료 등으로 충당한다.
“‘좋아요’ 같은 기능은 없어요. 사람들이 ‘좋아요’ 수만 보고 책이나 모임을 선택하는 걸 막기 위해서죠. 사람들의 글을 보고 읽을 책을 스스로 고르게 하려는 취지에요.”
그는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외국계 기업의 재무팀에서 일하며 CFO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온 직장인이었다. 그러다 ‘돈’ 대신 다른 것을 좇고 싶어졌다고 했다. “돈은 먹고 살 만큼 벌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책을 택한 건 어릴 적부터의 ‘도피처’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유튜브 같은 게 없던 시절 비루한 현실에서 도피할 유일한 수단이었어요. 최신 기술의 영화나 게임도, 책을 읽고 상상한 저만의 세계를 온전히 구현하진 못합니다. 그래서 책을 영화화하면 욕을 먹는 것 같아요.(웃음)”
단지 ‘최고의 도피처’를 제공하려고 그믐을 시작한 건 아니다. “회사 다니면서 동료들과 밥 먹을 때마다 수다를 떨었어요. 단 한 번도 책에 관한 주제가 나온 적은 없었죠. 드라마 얘기, 돈 얘기, 다른 부서 뒷담화....과연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싶었어요.”
책을 멀리하면서 사람들은 ‘맥락을 보는 눈’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이나 유튜브 쇼츠로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뭔지 알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해를 하려면 재판을 알아야 해요. 재판을 이해하려면 사법부가 필요한 이유를 알아야 하고, 그걸 이해하려면 삼권분립을, 삼권분립을 이해하려면 권력의 견제를, 권력의 견제가 왜 필요한지 이해하려면 인권의 중요성을 알아야 해요. 정보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맥락을 형성하는 매체가 책이에요.”
맥락을 읽지 못하면 판단력을 잃는다고 했다. “독서는 때론 지루함을 참아야 하고, 인지력과 집중력도 발휘해야 합니다. 에너지가 들죠. 바쁘고 지친 현대 한국인들은 그래서 맥락을 스스로 읽기보단 남이 대신 떠먹여주는 걸 선호해요. 가공된 프레임과 맥락에 무비판적으로 세뇌당하거나 선동당하기 쉬운 거죠.”
그래서 ‘함께 읽는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인은 남을 의식해요. 유행에 민감한 것도, ‘냄비근성’을 보이는 것도, 그래서라고 생각해요. 동시에 힘들고 귀찮은 것도 모여서 하면 잘합니다. ‘지기 싫어서’든, ‘눈치가 보여서’든 간에요... 러닝크루가 유행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해요. 저는 리딩크루를 만들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