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미디어] 우리의 마라톤

2024-10-24

가을을 맞아 여기저기 마라톤대회가 한창이다. 얼마 전, 울산에서도 태화강 국제마라톤대회가 열렸다. 나도 친구와 함께 10km에 참가했다. 올봄 경주 벚꽃 마라톤대회에서 5km를 뛰고 아쉬움이 남아 욕심을 좀 냈다. 그런데 욕심을 낸 것 치고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핑곗거리가 많았다. 어느새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대회 3일 전, 급하게 러닝머신에 올랐다. 운동 유튜버의 지령에 맞춰 9km 뛰었다. 집에 와서 신발을 벗으니 하얀 양말에 시뻘건 피가 번져있었다. 피의 출처는 두 번째 발가락 옆면이었다. 나는 유독 둘째, 셋째 발가락 사이 간격이 좁았고 살짝 자란 두 번째 발톱이 셋째 발가락 옆면에 상처를 낸 것이다.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발가락이 도와주질 않네. 완주, 할 수 있을까?’.

대회 전날은 무리하지 않고 5km 정도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대회 당일,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운동복을 입고 배에 커다란 번호표도 달았다. 그리고 친구와 나눠 먹을 바나나를 챙겨 집을 나섰다. 쌀쌀한 새벽공기에 닭살이 돋았지만, 마음만은 상쾌했다. 다 잘 될 것만 같은 용기가 샘솟았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작은 변명거리도 생각했다. 태어날 때부터 이상하게 생겨 먹은 그놈의 발가락 때문이라고 자기 위안을 할 참이었다.

울산종합운동장에 도착해 짐을 맡기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치어리더 공연도 보며 행사를 즐기니 출발 시각이 다가왔다. ‘탕!’하는 우렁찬 총소리에 맞춰 하프 코스 참가자들이 출발하고, 정확히 8시 40분 또 한 번의 총성과 함께 10Km 참가자들이 출발했다. 마라톤 코스는 울산종합운동장에서 출발해 동천지하차도를 올라 가구삼거리에서 다시 유턴에 돌아오는 코스였고 본격적인 달리기는 운동장을 벗어나고부터 시작됐다.

평소 차로 달리던 도로를 내 두 발로 딛고 달리니 느낌이 이상했다.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모르고 지나오던 도로의 높낮이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허벅지 근육은 더 단단해지고 호흡의 길이는 길어졌다. 내리막이 시작되면 다리는 조금 가벼웠지만, 몸의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생각을 비우고 오롯이 달리는 것만 집중하다 보니 금세 5km 반환점에 가까워졌고 나는 그때부터 조금 여유를 찾았다. 온 만큼만, 딱 그 정도만 더 가면 되었다.

함께 간 친구와 앞뒤로 나란히 걸으며 페이스를 맞춰 나가다 도착점을 3km 정도 남기고 각자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와의 싸움이었다. 한참을 집중하던 그때 반대편 도로, 그러니깐 내가 이미 달려온 길 위를 달리는 나와 같은 색깔의 배 번호를 단 남자가 보였다. 쩔뚝거리는 왼쪽 다리, 헉헉거리는 숨소리. 그는 힘겨워 보였지만,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순간, 완주를 못 하면 거리가 가까운 두 발가락을 변명거리 삼으려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주변을 바라봤다. 파란 운동복을 맞춰 입은 커플, 사이 좋아 보이는 부자, 비대한 몸집의 남자, 근육질의 어머님,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 소녀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속도로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서로 일면식도,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지만, 같은 길 위를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힘을 받았다. 인류애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몇 킬로를 더 달리자 출발했던 체육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처음으로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과 도취감이 몰려왔다. 왜 마라톤의 인기가 이토록 뜨거운지 알 것 같았다. 얼마 뒤,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운동장으로 들어오는 친구가 보였다. 친구는 누구보다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카메라로 그 모습을 소중히 담았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함께 서로의 완주를 축하했다. 짧은 축하 의식을 마치고 우리는 간식과 메달을 받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러다 문뜩 반대쪽에서 달려오던 그 남자가 어디쯤 왔을지 궁금해졌다. 연거푸 뒤를 돌아봤지만, 아직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멀리서나마 아직 끝나지 않은 그의 달리기를 응원하며 부디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진보화 청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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