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아메리칸 드림’도 없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6-05

급행료(急行料)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긴 하나 공식적 용어로 보기 어렵다. ‘일을 빨리 처리해 달라는 뜻에서 비공식적으로 담당자에게 건네주는 돈’이란 뜻이다. 여기서 담당자란 주로 민원 접수 창구에서 일하는 공무원을 의미한다. 재판을 앞둔 피고인의 수사 기록 복사, 억울한 구속을 호소하는 피의자를 위한 보석 신청 등 화급을 다투는 사안에서 법원 및 검찰 직원이 서류를 붙들고 앉아 하염없이 시간만 끌면 애꿎은 민원인만 속이 타지 않겠는가.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악용해 돈을 챙기다니, 사실상 뇌물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선 사라진 급행료 악습이 몇몇 외국에선 아직도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다. 공무원 권한이 강한 사회주의 국가, 부정부패가 심한 개발도상국 등이 그렇다. 그곳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수출입 통관 과정에서 “일을 빨리 처리해줄 테니 웃돈을 얹어 달라”는 현지인의 부당한 요구에 직면하는 사례가 잦다고 한다. 2016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계 기업의 경우 일본 등 타국 기업보다 급행료 등 비공식적 절차를 통해서라도 무조건 빠른 통관을 선호해 오히려 현지 당국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직후인 올해 2월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이 한국 기업인들과 만났다. 러트닉은 “(개별 기업이) 미국에 10억달러(약 1조3570억원) 이상 투자하면 미 정부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각종 심사에 걸리는 기간 단축과 규제 완화 적용 등 이른바 ‘패스트트랙’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내면 그만큼 일도 빨리 처리해준다’는 급행료의 원리가 떠오른다.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주의 시장경제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한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기업만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앞서 개인이 500만달러(약 67억8500만원)를 지불하면 미국 영주권을 부여하는 ‘골드카드’ 제도를 시행한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에는 이른바 ‘비자 급행료’ 도입을 검토하고 나섰다. 미국 비자 신청자가 1000달러(약 136만원)를 웃돈으로 건네주면 인터뷰 순서를 앞당기는 등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무일푼의 외국인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노력 끝에 성공 신화를 쓰는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 이제 미국은 돈 많은 외국인들에게만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이 되어가는 듯해 씁쓸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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