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잎이 진다고 꽃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40)는 자신의 책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에 이렇게 썼다. 꽃잎이 지면 사람들은 서글퍼하지만 꽃받침과 꽃술은 그대로 남아 있다. 또 꽃잎이 지고 나서야 열매가 맺히고, 떨어진 꽃잎은 흙 속 생물의 먹이가 된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머잖아 질 봄꽃이 가득한 이곳에서 그를 만나니 꽃이 달라 보였다.
신씨는 대학에서 식물분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미국 스미스소니언 환경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스미스소니언은 박물관·미술관·연구소 등을 거느린 세계적인 문화재단이다. 1000㏊ 규모에 숲·강·늪지 등 다양한 생태 환경이 조성된 연구소에서 학자로 사는 삶. 근사해 보이는 이 생활이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1년간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왔을 때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낯선 환경, 언어와 문화의 장벽, 센터의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외로움까지 힘든 부분이 많았죠. 그럴 땐 숲속을 무작정 걸었어요.”
3년 반 뒤, 다짐과 달리 신씨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이미 경험해본 외로움이 두려웠으나 식물 연구를 하기에 그곳만큼 좋은 곳은 없었다. 지금 그는 난초의 생장을 돕는 곰팡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난초 씨앗은 특정 곰팡이를 통해서만 영양분을 공급받아 새싹을 틔울 수 있어요. 난초가 잘 자라려면 흙과 물, 공기의 도움도 꼭 필요하죠.”
처음 식물학자를 꿈꾼 건 여섯살 때였다. 부모님은 식물을 좋아하는 그에게 어린이 식물도감을 선물했고, 그는 거기서 식물학자라는 직업을 알게 됐다. 학교에서 씨앗을 주워다 집 마당에 심기도 하고 꽃을 분해하기도 했다. 친오빠는 그런 그에게 ‘식물파괴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어릴 적 꿈을 이룬 삶.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대입을 준비할 땐 대체 어떻게 해야 식물학자가 될 수 있는지 막막했다. 식물학자를 본 적도 없고 대학엔 ‘식물학과’도 없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미대 진학을 희망하기도 했으나 부모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그는 2학년 때 전공을 정하는 자율전공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1학년 때부터 식물분류학 연구실에 들어갔고 2학년 때는 주저 없이 생물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여전히 미술에 대한 꿈도 있었기에 패션디자인을 복수로 전공했다. 식물과 미술, 두가지를 모두 좋아한 그는 대학생 때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된다.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은 식물의 정보를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그리는 그림이에요. 의학책에 실리는 인체해부도처럼요. 전달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어떤 부분은 생략하기도, 어떤 부분은 더 강조해서 그리기도 하죠.”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생소한 분야였기에 신씨는 일본에서 나온 책을 보고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2010년, 영국에서 이 분야 권위자의 워크숍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갔다. “과학적인 내용을 그림에 잘 담아냈다”는 호평을 들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식물을 더 열심히 그려나갔다. 그 후 성과는 알려진 대로다. 2013년부터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여는 ‘보태니컬 아트 국제 전시회’에 네차례 참여했고, 그의 작품은 매회 우수작으로 뽑혔다.
보태니컬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는 대부분 미술 전공자다. 하지만 단순한 세밀화가 아닌 다른 종과 차별되는 특성을 담아내야 하기에 식물분류학자인 신씨는 더욱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현미경으로 세포 배열을 관찰해 표현하거나 암술과 수술을 따로 떼어내 그리기도 하고, 꽃을 자른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씨앗부터 꽃, 잎, 열매까지 식물 생애 주기 전체를 담기 때문에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1년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요즘엔 난초에 빠져 있어서 난초를 그려보려고 해요. 난초는 국화과 식물 다음으로 종이 많은데 주변에서 쉽게 볼 순 없는 게 특징이에요. 희귀하고 독특한 생김새를 지닌 종이 많고요. 작품은 주로 수채화로 그리는데 아크릴이나 유화 물감 같은 색다른 재료를 써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최근에는 ‘런던 린네 학회’가 식물 그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 식물학자에게 주는 ‘질 스미시스 상’을 받았다. 주최 측이 요청한 수상소감에 그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적었다. 9월엔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식물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치러 떠난다. 두려운 마음이 크다는 그. 하지만 늘 그랬듯 그는 이번에도 자신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황지원 기자 support@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