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냐, 배신자냐. 선택해, 트렌트.”
리버풀 안필드 인근 오크필드 로드 근처 폐가에 쓰인 문구다.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는 리버풀 팬들이 붉은 연기와 노랫소리 속에서 마주한다. 종이 위 문장은 고향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행을 택한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를 겨냥하고 있다.
리버풀 유소년 출신이자 지역 태생 알렉산더-아놀드는 여섯 살부터 리버풀에서 성장했고, 프리미어리그와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포함해 모든 주요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제 26세. 그는 커리어 정점에서 리버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을 채비를 마쳤다. BBC는 ‘지역 스타와 팬들 사이 불안한 관계’라른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이적은 단순히 한 스타 선수가 팀을 떠나는 사안이 아니라 클럽과 지역 사회, 그리고 축구 팬들 사이의 ‘정체성’ 문제로 이어진다”며 “그의 작별은 축하와 환호, 그리고 야유가 뒤섞인 혼란의 감정 속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프리미어리그는 글로벌 산업으로 성장했지만, 지역 출신 선수가 중심이 되는 팀은 찾아보기 어렵다. BBC 조사에 따르면 2024-25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10경기 이상 출전한 ‘지역 선수’(클럽 구장 반경 10마일 이내 출생)는 전체 559명 중 28명뿐이다. 1992-93시즌에는 379명의 잉글랜드 선수가 활약했으나, 이번 시즌은 191명으로 줄었다. 본머스, 노팅엄 포레스트, 사우샘프턴, 울버햄프턴은 지역 출신 선수에게 단 1분도 출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리버풀 지역 축구 전문 팟캐스트로 활동하는 조시 섹스턴은 “지금 축구는 지역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트렌트의 경우는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정말 붙잡고 싶어하는 선수”라고 말했다. BBC는 “알렉산더-아놀드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도 여전히 뿌리를 지닌 인물”이라며 “그의 존재는 산업화 이전 영국 축구의 유산, 즉 ‘로컬 클럽-로컬 팬-로컬 플레이어’로 이어지는 정서의 마지막 끈이었다”이라고 전했다.
알렉산더-아놀드의 결정을 두고 일부 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가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는 이유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축구 팬들은 대체로 구단과 정체성을 공유하며 감정적으로 융합돼 있다. 킹스칼리지 런던 정신과학연구소 맷 버틀러 연구원은 “마치 친구가 이사 간 것처럼 느낀다”며 “친한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다는 현실이 배신감 혹은 상실감으로 이어지는 이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선수들이 오랫동안 한 팀에서 뛰는 사례는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에서 알렉산더-아놀드보다 나이가 많은 ‘한 클럽맨’은 솔리 마치(브라이튼) 단 한 명뿐이다. 과거 블랙번 로버스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경험한 크리스 서튼은 “지역 팀에서 뛰는 건 외려 더 큰 부담일 수 있다”며 “가족과 친구, 지역 사회 전체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느끼고 팬들의 기대치도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축구사회학자 데이비드 골드블랫은 “축구는 산업 노동계급이 사라진 시대 마지막 향수를 상징한다”며 “지역 클럽과 지역 선수는 단순한 ‘경기력’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과거엔 한 기업에 들어가 평생 일하고, 그 기업이 지역을 상징했다”며 “그런 게 사라진 지금 시대에 축구만이 그 기억의 잔재를 떠올리게 해준다”고 덧붙였다. BBC는 “알렉산더-아놀드는 그런 상징 중 하나였는데 그가 떠나는 지금, 팬들이 느끼는 것은 지역성과 공동체에 대한 상실, 그리고 그 감정의 빈자리를 메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