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뉴스는 지나갔지만, 그 의미는 오늘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그날’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 지금을 읽습니다.<편집자주>

2008년 11월 28일 늦가을. 젊음의 거리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한복판에서 백골 14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발견 지점은 종로구 연건동 한국국제협력단(KOICA) 옛 건물의 철거 현장, 그중에서도 창고 터 아래 비스듬한 굴 모양의 지하 공간이었다.
현장에서는 어린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두개골과 예리한 도구로 절단된 흔적이 남은 뼈, 그리고 동물의 뼈·오래된 잉크병 등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뒤섞인 채 발견됐다. 초기 감식 결과 이 유해들은 사망한 지 40년이 지난 성인 11명과 어린이 3명의 것으로 추정됐다.
도심 한가운데서 정체불명의 백골이 무더기로 발견되자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당시 현장 주변에서는 ‘연쇄살인범 암매장지설’, ‘전쟁 전사자 또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설’, ‘일제의 생체실험 흔적’ 등 온갖 괴담이 난무했다. 특히 2003~2004년 노인과 출장 마사지사 등 20명을 잔혹하게 살해한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의 여파로 “혹시 유영철의 소행 아니냐”는 근거 없는 공포까지 확산했다.
공사 인부들의 신고를 받은 관할 구청과 국방부, 경찰은 번갈아가며 조사를 벌였다.

△군과 경찰의 엇갈린 해석…전사자설 vs 방공호 민간인설=초기 조사는 혼선의 연속이었다. 한국전쟁 전사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시작한 국방부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입장을 선회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군 전사자의 유해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조사했으나 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유해 근처에서 일본 강점기 때 것으로 추정되는 잉크병이 나와 일본 강점기에 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쓰거나 부검 후 버린 시신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발견된 유해 상당수는 유아나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보였고 일부 두개골에서는 예리한 도구로 절단된 흔적까지 확인됐다.
반면 경찰은 해당 지하공간이 한국전쟁 당시 방공호로 사용됐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 때문에 피란 중 희생된 민간인의 유해일 수 있다는 추측을 내놓으며 변사 사건으로 검찰에 지휘를 요청했다.

△4개월 조사 끝에 국과수가 내린 결론은=미스터리를 푼 곳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었다. 경찰 의뢰로 약 4개월간 정밀 감식을 벌인 국과수는 발견된 백골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해부 실습 후 유기한 시신으로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근거는 명확했다. 일부 두개골에서 확인된 톱 형태의 절단면은 해부 실습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흔적이었고 유해가 묻힌 곳 또한 과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강의실과 대학병원 사이 공터였음이 확인됐다. 더불어 유골에서는 총상·골절·독극물 흔적 등 타살을 의심할 만한 외력의 흔적도 없었다.
정밀 감식 과정에서 유해는 초기에 알려졌던 14구의 두 배인 28구로 늘어났다. 국과수 관계자는 "한국전쟁 중 집단 총살 피해자들이라는 추측이나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생체실험(마루타)에 이용됐을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경찰은 국과수 발표를 토대로 사건을 내사 종결했고, 유해는 관할 구청으로 인계됐다.
이후 이 백골들의 행방은 묘연했으나 2021년 방영된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당신이 혹하는 사이'를 통해 후일담이 전해졌다. 방송에 따르면 28구의 백골들은 이미 모두 화장처리됐으며 보존 기간이 지나 같은 해 산골(유골 따위를 화장하여 그대로 땅에 묻거나 산이나 강, 바다 따위에 뿌리는 일) 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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