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저널]이종호 기자= 코로나19가 전 지구를 휩쓸었을 때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정지의 힘',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는 싯구로 깊은 울림을 준 백무산 시인이 5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누군가 나를 살아주고 있어>(창비시선)를 펴냈다.
창비 출판사는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노동시의 거목으로 우뚝 선 시인이 인생 70년의 연륜과 시력 40여 년의 경륜을 고스란히 녹여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자본주의 문명의 실상을 비판하는 공동체적 사유의 세계를 펼친다"고 이번 시집을 소개했다.
시인은 현대사회를 "멈추지 않"고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도 없는 기차"에 비유한다. 우리는 아무리 달려도 기차를 멈춰 세울 수 없다. "기차의 목적지는 기차 안에 있기 때문"('기차에 대하여')이다.
달리는 대신 "멈추어서 부지런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하지 말아야 찾아오는 새가 있"고 "멈추어야 자신을 보여주는 꽃이 있어"('멈추어서 할 일들')서다. 5년 전 시집에서는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정지의 힘')고 했다.
멈춰 선 시인은 "우리가 얼마나 안으로 망가진 세상을 살아왔는지"('사람의 한 자리'), "내부 수리가 급한 건 나"('내부 수리')였음을 곱씹고 "우리는 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저자의 말')라고 묻는다.
시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조금씩 살아주기도 한다는 걸" 깨닫고 "어디선가 조금씩 나를 불러주고 대신 살아주어/간신히 내가 나로 살아 있는" 것이라는 통찰에 이른다.
출판사는 이를 "'인간은 서로를 살아주는 존재'임을 믿는 따뜻한 생태적 존재론"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능력"과 "멈춘다는 걸 이해하는 능력"은 곧 사람의 "곁에 있어주는 능력"('곁에 있어주는 능력')이고 "나의 몸을 대주어 너를 지피"('아궁이')는 연대의 윤리를 모색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해석이다.
'시간'의 문제를 천착해 온 시인은 "우리의 시간은 미래가 현재를 먹어치우고, 살아 있는 '어제'는 죽은 사물이 되어 오늘은 덧없이 얇아져 부서지기 쉬운 그릇이 되고 만 것 같다"며 "현재는 눈앞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생애의 시간 전체의 두께에서 일어나고, 지질학적 시간도 우리 생애에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저자의 말')고 했다.
"나의 기억은 자신의 내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라는 공유지에 우리 모두 섞여 있었고, 그것은 과거도 아니고 시간도 아닌 오늘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장소일 것"이라는 시인의 말은 "모든 관계는 단순 접속이 아니라 생태적 연결"이고 "이런 무의식적 연결은 우리가 동시에 담기는 공통 자아 같은 것"(<창작과 비평> 2020년 여름호)이라는 사유와 이어진다.
백무산 시인은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4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의 시집을 냈다.
1989년 이산문학상, 1997년 만해문학상, 2009년 오장환문학상, 2012년 대산문학상, 2015년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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