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이다. 경제부 기자 시절 YS(김영삼)의 가신과 차를 한잔한 적이 있다. 그가 대뜸 물었다. “박 기자는 어르신을 어떻게 생각하노?” 나는 YS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경제를 망친 건 용서 못합니다. 전 IMF세대라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진짜 할 말이 없소. 근데 이건 기억해주세요.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그건 어르신이 아니었으면 못했습니다.”
금융실명제는 인정하겠는데, 하나회 청산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나는 다시 물었다.
“두고 보세요. 이제는 절대 쿠데타는 못 일어납니다. 정국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군대는 휴전선만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게 경제를 살리는 겁니다.”
경제부 기자의 눈으로 주변국들을 둘러봤더니 그의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 한국은 그간 많은 정치적 격변을 겪었지만 군은 튼튼히 국가 안보만 책임졌다. 내부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군의 중립은 확고했다. 그러는 동안 시민들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갔다. 정치혼란 때마다 군이 수도로 진격하고 경제활동이 일제히 멈춰 서는 동남아 일부 국가들과 달랐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도 믿을 만한 파트너로서 한국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차별점이 됐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로빈슨 미 시카고대 교수는 최근 한국 언론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 부문에서 성과를 낸 건 맞지만 한국이 오늘날처럼 번영하는 데는 민주화가 핵심적이었다”며 “군사정권이 여전히 집권 중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말하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파묘(破墓)’였다. YS가 30년 전 깊이 파묻어버렸다고 생각한 쿠데타의 망령. 그것이 끝끝내 무덤을 깨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이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명백한 친위쿠데타였다.
돌아보면 쿠데타의 망령은 YS 생각처럼 깊이 매장된 것이 아니었다.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12·12의 잔재들은 천수를 누렸다. 태극기부대와 극우 유튜버는 망령에 에너지를 계속 댔다. 그 결과 파묻힌 관 두껑은 진보정권이 강할 때는 잠잠했지만, 보수정권이 득세하면 계속 덜컹댔다.
애초 거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은 쿠데타를 강하게 부정하기 힘들었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전당대회를 참관하면서 느꼈던 새누리당의 정체성은 ‘박정희와 공화당’이었다. 그런 당에 쿠데타에 대한 부정은 자기부정이 된다.
윤 대통령은 12일 대국민담화에서 “계엄령 선포는 질서유지를 위해 소수의 병력을 잠시 투입한 것”이라 말했다. 대통령의 계엄에 대한 이 같은 시각은 박정희, 전두환을 추종하는 극우의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박정희도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계엄이란 총칼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내 심사에 거슬리면 누구나 ‘체포’할 수 있고, ‘처단’할 수 있다. 아침 출근길에 무장한 군인이 가방 검사를 하고, 술 마시다가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현장에서 체포됨을 의미한다.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다는 포고령 1항이 적시한 내용이다. 만약 그날 밤 국회와 시민의 대응이 늦었더라면 이 시간 수도방위사령부 지하벙커에 이재명, 한동훈 등 여야 정치인과 언론인, 학자, 대학생들이 포박돼 있을지도 모른다. 총칼이 시민을 억압하는 사회, 이게 공산주의다. 북한은 결사와 집회, 시위, 언론의 자유가 없다. 윤 대통령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이 ‘자유헌정질서’일 리 없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 때 박근혜 당시 의원은 웃으면서 의사당을 활보했다. 12년 뒤 정작 탄핵당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만약 2004년 탄핵안 가결이 없었더라도 2016년 대통령 탄핵이 이뤄졌을까? 무릇 세상일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12·3 비상계엄이 ‘고도의 통치수단’으로 인정된다면 다음 정권도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쿠데타 망령이 다음번엔 보수우파를 제물로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친위쿠데타가 게임 룰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글로벌 선진국 경쟁에서도 탈락한다. 계엄을 대하는 자세는 단호해야 한다. 여기엔 보수,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파묘된 계엄의 망령을 빨리 파묻어라. 깊숙이 아주 깊숙이.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