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기는 집에 돌아와 3일 동안 소변을 보지 않았다. 아빠 A씨는 아기를 데리고 인근 병원으로 내달렸다.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고비를 넘겼다. 경황이 없던 A씨는 외국인 아동에게는 출생신고 격인 ‘외국인 등록’을 기한 마지막날인 출생 90일째에 완료했다.
그해 말,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1600만원 가량의 병원비 고지서가 날아왔다. 건보공단은 아이 치료비에 건강보험을 적용했던 것을 무효로 하고 차액을 환수하겠다고 통보했다. A씨가 아이를 출생 92일째에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한 것이 이유였다. 기한보다 ‘이틀’이 지연됐으니 92일째까지는 건강보험을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 140만원이던 병원비가 10배 넘게 불어났다.
한국인 아동은 출생신고가 늦으면 최고 5만원의 과태료를 낼 뿐, 이처럼 소급해서 건강보험을 미적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출입국사무소에서는 건보공단에 돈을 내지 않으면 비자를 연장해줄 수 없다고 했다. A씨는 이자까지 더해진 병원비 1700만원 중 대부분을 대출받아서 건보공단에 납부해야만 했다.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어떤 아동들 앞에서는 멈춘다. 국내 체류 중인 이주 아동(외국국적 아동)은 ‘꼼꼼하게’ 차별적으로 설계된 의료제도로 인해 ‘재난적 의료비’를 지출하고 병원을 겨우 이용한다. 참다참다 병을 키워 병원에 가는 경우가 많아 한국인 아동에 비해 입원률과 응급실 이용률이 몇배는 높다. ‘이주와 인권연구소’가 17일 공개한 ‘2024 이주민 영유아 건강권 실태조사’에는 낮은 의료 접근성으로 인해 건강권을 위협받는 이주 아동 171명의 실태가 생생하게 담겨있다. 작가 은유의 책 제목처럼 ‘있지만 없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주 아동은 부모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비자가 있는 등록 이주민인 경우와 비자가 없는 미등록 이주민인 경우를 뜻한다. 부모가 직장이나 지역에서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으면 사정이 조금 더 낫긴 하지만, 이주 아동들은 대체로 높은 의료비와 낮은 병원 접근성에 놓인 보건의료 취약계층이다.
‘이주민과함께’ 등 9개 이주인권 단체 활동가들은 시민단체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을 받아 국내 체류 이주 아동의 건강권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는 부모가 모두 외국 국적자이며 2018년 1월 1일 이후 태어난 영유아,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아동으로 대상을 한정했다. 상대적으로 의료자원이 빈약한 비수도권 지역에 거주하는 이주민이면서 영유아인 경우에 초점을 맞췄다.
국내 체류 이주민은 2022년을 기점으로 다시 증가하고 있는데, 이주 아동의 증가 속도는 전체 이주민 증가속도에 비해 훨씬 빠르다. 보고서에서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정책 통계연보를 이용해 계산한 결과, 2018년에 비해 2023년 체류 외국인(250만7594명)은 5.9% 증가했는데, 이중 10세 미만 아동(8만8673명)은 8.3% 증가했다. 장기체류자만으로 보면 이주아동은 19.3%나 늘었다.
체류자격에 따라 이주민도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운데다가 보장 범위도 제한적이다. 보고서는 “제도적 차별에 의한 건강 취약성이 이주민의 자녀에게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주 아동들은 태어나자마자 받는 각종 필수 예방접종에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아동의 경우 만 1세의 필수 예방접종 완전접종률이 96.4%(질병청 2023년 예방접종률 현황)로 100%에 가깡웠으나, 이주아동은 55.2%로 절반 수준이었다. 인플루엔자(독감) 예방접종은 한국 아동의 83.0%(2022 국민건강통계 1~5세 기준)가 받았으나, 이주아동은 절반도 안 되는 44%만이 받았다.
한국 아동의 연간 외래 이용률은 94.5%(2021년 10세 미만 아동 기준)로 대개 1년에 한 번 이상 병원에 갔다. 이주아동은 최근 1년 새에 병원에 한 번 이상 갔다고 한 비율이 72.5%에 그쳤다. 반면 연간 입원율은 이주 아동이 36.8%로 한국 아동(6.8%)에 비해 5배 이상 높았다. 응급실 이용률도 24.6%로 한국 아동(8.3%)에 비해 3배 가량 높았다. 보고서는 “이주민 영유아들이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상태가 악화돼 입원 치료가 필요한 중증 상태가 되거나 응급 상황에 이르러서야 의료기관을 이용하게 되는 비율이 높다”고 추정했다. 최근 1년간 의료기관에서 치료나 검사가 필요했지만 받지 못했다는 미충족 의료율은 한국 아동이 2.4%였으나, 이주아동은 8배 많은 19.3%였다.
건보없이 병원 이용하면 ‘의료관광객’에게 적용되는 ‘국제수가’ 내야
이주민도 체류자격에 따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현재의 건강보험 제도는 가입자격부터 체납 시 제재까지 “모든 면에서 이주민에 대해 차별적으로 운용”된다. 이는 가정의 부담능력을 초과하는 ‘재난적 의료비’로 이어진다.
미얀마인 B씨는 매우 안정적인 취업 및 장기체류 비자로 분류되는 E-7-4 비자를 가지고 있다. 부인을 한국으로 초청할 수 있게 돼 지난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아이가 출산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숨이 가빠지면서 경련을 했고, 대형병원 응급실을 통해 입원을 하게 됐다.
B씨가 아기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해서는 미얀마 대사관에 출생신고를 하고 아이 명의의 여권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미얀마가 내전 중이라 아이 여권을 받는 데까지 길게는 3년까지 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앞선 A씨의 사례처럼 3년간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등록을 못하는 동안 병원비가 일주일만에 7000만원이나 나왔다. B씨는 출입국사무소와 대사관을 오가며 사정사정해 겨우 피부양자 등록을 마쳤다. B씨의 아이에게는 장애가 생겼는데,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병원비만 한달에 200만원이 넘게 나오고 있다.
미등록 이주민은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다. 한국인의 경우 건보 적용이 안 되면 병원 이용 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은 비급여 기준으로 의료비가 계산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의료기관에서는 이주민에게 이보다 더 비싼 의료비를 부담시키고 있다. 의료기관들은 외국인 의료 관광객들에게 1.5~2배 가량 높은 의료비를 받곤 하는데, 통상 ‘국제수가’라 불리는 이 비용을 이주민들에게도 적용하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아동 부모들은 “아이가 감기로 아파서 병원에만 가도 10만~15만원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울산에 사는 미등록 이주아동 부모 C씨는 “돈보다 아이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아프면 꼭 병원에 데리고 갑니다. 그렇지만 병원에서 입원하라고 하면 그렇게는 못하고 약만 받아옵니다.”라고 말했다.
해외에 주로 살면서 국내에 잠시 들어와 건강보험의 혜택만 누리고 가는 일명 ‘무임승차자’들을 막겠다는 취지로 여러 차례 개정된 건보제도는 이주민 배제 수단으로 변질됐다. 2018년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건강보험 지역 가입자 기준을 국내체류 3개월에서 6개월로 높였다. 만약 1개월 이상 출국했다 돌아오면 다시 6개월을 체류해야 지역가입자 자격이 생긴다.
국외체류기간이 6개월 미만이면 그동안의 보험료를 납부하고 지역가입 자격을 바로 취득할 수도 있으나, 이주민 다수는 6개월간 건강보험 없이 지내는 방법을 택한다. 이는 가족구성원들이 같이 살면 하나의 세대로 묶이는 한국인과 달리, 이주민들에게는 세대원 각각에 대해 보험료가 부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주아동들은 건보 외에 다양한 의료비 지원제도에서도 배제된다. 특히 장애인 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희귀질환이나 장애를 가진 경우에는 더욱 열악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아이가 뇌수막염이 있는 미얀마인 D씨는 “월급이 250만원 정도 되는데 한 달에 병원비가 200만원 넘게 나와서 병원비를 내고 나면 생활비가 없다”고 했다.
보고서는 이주민에 대한 각종 차별을 일거에 없애기 어렵다면, ‘아동’의 건강권만은 보장하자고 강조한다. 한국은 1991년에 UN의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을 비준했다. 이에 따라 국내 모든 아동에 대해 차별 없는 학습권·발달권·건강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협약을 토대로 해 미등록 이주아동의 주거권, 교육권 등 기본권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라는 권고를 여러 차례 내놓았다.
이주민 관련 단체들은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점으로 국내 체류하는 이주 아동들에게만이라도 ‘국제수가’를 적용할 수 없도록 규제하자고 지적했다. 국제수가는 의료관광 목적으로 입국한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시행규칙을 개정해서 대상을 한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장 건보 제도 내 차별을 없애기 어렵다면 이주 아동을 위한 의료지원사업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신설하는 방법도 있다. 복지부는 ‘외국인 근로자 등 의료지원 사업’을 통해 기존 제도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외국인 노동자의 의료비를 지원한다. 지원 대상에 이주 노동자의 배우자와 자녀가 포함돼있으나, 지원 액수가 적고 보장 범위가 너무 좁다. 지원 비용 상한이 500만원으로 정해져있으며, 노동자 당사자가 아닌 자녀는 외래진료만 지원된다. 국비 지원액은 2024년 한해에 25억원으로 책정됐는데, 금액이 너무 적어 조기 소진된다. 보고서는 “예산을 늘리는 것도 시급하지만,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산모와 이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지원사업을 별도로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