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빈자리, 그리고 나의 길

2024-12-18

작년 2월 27일 월요일이었습니다. 큰아이 방학을 맞아 싱가포르에 가 있던 그날 새벽, 갑자기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아빠가 이상하니 너라도 먼저 빨리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이틀 전인 토요일 만해도 아버지와 함께 진료했던 저는 다급한 마음으로 비행기 표를 끊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시간이 어찌나 초조하던지, 정말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버지께 못 되거나 모진 아들은 아니었는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불효를 한 건 아닌지…’ 이제는 아버지께 사과도 용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무겁고 무서웠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큰 기둥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떠나셨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잘 알지 못하는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버지께 차분히 온전하게 마음을 내드리지 못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를 되새겨 보려고 애썼습니다. 한없이 슬프다가도 한편으로는 또 아버지께 문제가 생기면 내가 너무 힘들어할 것을 아시기에 내가 자리에 없을 때 그렇게 되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아버지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병원과 병원 식구들, 평생을 바치신 이 병원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여러 이슈들이 있었지만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 병원 직원분들, 노원구 보건소, 노원구 세무소 등 여러 관계자분들 덕분에 큰 문제 없이 병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평소 어떤 분이셨는지, 어떤 덕을 쌓으셨는지 그 이후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병원에 오셔서 눈물을 흘려주셨고, 6개월 정도는 병원에서 거의 매일 곡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도 울면서 진료했습니다. 환자분들께서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저에게 나누어주셨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일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 항상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면서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노원구에 오래 계시면서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노력하셨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셨는지를 돌아가시고 나서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평생을 사셨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아직도 슬퍼해 주시고 기억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2대째 이어온 병원에서 아버지와 10년, 15년 함께 일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랫동안 같이 병원 살림과 환자분들의 치료를 논의하고 꾸려갔더라면 좋았겠지만, 당시 1년 남짓한 시간 이후 병원 전체를 책임지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전까지 아버지를 보고 오시던 환자분들께서 이제는 저를 믿고 와주실까 하는 걱정이 가장 컸습니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제 실력과 환자분들에 대한 진심으로만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중보건의사를 끝내고 나서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모교인 경희대학교 보철과를 전공하고 나왔던 것이 참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항상 환자분들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2년 정도 지난 지금, 제가 치료해드린 환자분들께서 주변 분들을 많이 소개해주시고 데리고 와주십니다. 그것이 치과의사로서 보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와주시는 환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감사한 한 가지는 아버지께서 해 놓으신 치료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드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주변에 많은 치과의사분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치과의사 이외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치과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몽골 울란바토르로 처음 의료봉사를 갔을 때입니다. 환자분들은 아픈 이를 치료하기 위해 사흘을 말을 타고 오셨습니다. 도착해서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치료받으시고, 치료가 끝난 뒤에는 울면서 감사 인사를 하시는 모습에 한편으로 안타우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강요에 의한 선택이 아닌,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몸소 보여준 아버지의 교육은 제가 우리 아들, 딸한테 보여주어야 할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자식들을 키워가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점점 더 이해하고 깨닫게 되겠지요.

아버지께서 하시던 연구도 더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특허받으신 CBK(Cranial Balancing Key) 스플린트를 더 알리기 위해 2023년 8월 캐나다에서 열린 제 8회 캐나다 국제발명혁신대회(iCAN 2023)에 CBK 스플린트에 대해 출품을 하였고, 그 대회에서 금상 및 5관왕을 수상하였습니다. 2023년 11월, 코엑스에서 열린 International College of Dentists(ICD) 국제본부 이사회에 참가한 세계 각국의 100여명의 치과의사들에게도 “CBK 스플린트 전신 건강을 지킨다(FDA가 인증하고 특허받은)” 영문판을 선물하였습니다. 사진은 대만 잡지에 실린 책의 내용입니다. 앞으로는 이 내용과 관련하여 학술적인 논문을 남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병원에서 아버지를 아시는 환자분들과, 제가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오시는 병원 식구들과 보내는 일상이 새삼 여러 의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처음 개원하신 때부터 찾아주시는 환자분들이 계시는 이 병원이 행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이곳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행복한 여정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 지금 부모님께 전화드려 안부를 여쭙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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