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ED로 되살린 '박서보 색채묘법'…기술로 빚은 자연을 만나다 [조상인의 미담]

2025-09-05

어느 가을날, 온 산을 뒤덮은 붉은 단풍 앞에서 화가 박서보(1931~2023)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단풍 빛에 압도돼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고 말한 그는 외마디 탄성이 준 치유의 순간을 기억에 새겼고 그 빛을 화폭으로 옮겼다. 이른바 박서보 ‘후기 묘법(描法)’ 시리즈의 시작이다.

노 화백은 “자신을 무릎 꿇게 만든 색”이라 언급했던 단풍의 붉은색 외에도 자연에서 다양한 색을 마주하며 색채 감각을 담아냈다. 제주도의 봄을 물들인 유채꽃의 노란색은 연약한 존재에 깃든 희망, 시작과 용기를 북돋우는 새로움의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풀잎과 나무에서 가져온 초록의 ‘어린잎색’은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손짓 같았다. 짙은 주황빛 ‘홍시색’은 가을의 풍요와 성숙을 의미했다. ‘진달래색’이라 부르는 화사한 분홍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리움의 색이었다. 검은 그을음 같은 ‘아궁이색’에는 잘 먹어야 건강하다며 삼시 세끼 밥을 지어주시던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쌓여 있다. 가공하지 않은 비움 그 자체인 ‘자연의 백색’과 그 감각을 일깨워 숨통을 열어주는 ‘공기색’까지.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가 간절히 추구했던 ‘자연의 색’으로 다시 태어났다. LG전자가 3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해 6일까지 열리는 ‘프리즈 서울 2025’에서 ‘박서보 X LG OLED TV: 자연에서 빌려온 색’ 특별전을 통해 박서보의 색채 철학을 재현했다. 프리즈 서울의 공식 헤드라인 파트너인 LG전자는 2023년에는 김환기의 ‘번짐’, 지난해에는 서세옥의 ‘붓질’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해 한국 미술의 거장을 새롭게 보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박서보의 대형 원화 8점이 전시장을 에워싼 가운데 이들 작품을 재해석한 미디어아트가 LG OLED TV 97인치 8대로 연출한 T자형 설치 작업이 돼 시선을 잡아 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박제성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협력했다. 그는 “인공지능(AI)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과 기억들 속에서 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라는 점에 착안해 수 년째 AI 협업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다.

박 교수는 “박서보 선생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색을 포착했는데 개인으로서 겪은 이 예술적 경험이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맞물리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각으로 본 단풍의 색을 데이터로 수집해 ‘단풍색’ 작품에 반영했다. OLED 화면 속 작품은 모두의 ‘아궁이색’이요, 모두의 ‘단풍색’ ‘홍시색’ ‘유채꽃색’인 셈이다. 밭고랑 같은 직선이 반복된 박서보의 ‘묘법’이 서서히 움직이더니 파도나 바람 같은 움직임을 그리며 일렁이고 뒤섞인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박 교수는 “개인의 시각이 다중의 경험으로 확장돼 누구나 예술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인간 몸짓의 반영인 행위의 반복을 ‘몸 없는 인공지능’이 반영한 움직임을 통해 기술이 주도하는 시대에 가장 인간적인 행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자연이 선물한 색의 위대함, 인간이 가진 몸짓의 의미가 기술 위에서 교차한다.

추상의 탄생을 이끈 미술사의 혁명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예술이 “우리가 말로 옮길 수 없는 감정들을 깨워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색채와 형식이 고유의 정서적 힘을 지닌다고 생각했고 저서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색채는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수단”이라고 적었다. 박서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연의 색에서 치유와 위로의 힘을 찾아냈다.

생전 박서보는 자신의 후기 묘법이자 색채 묘법인 작업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디지털 시대인 21세기는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그로 인해 많은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온 지구가 스트레스 병동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부터 나의 예술은, 21세기 예술은 치유의 예술이 돼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과도한 정보와 시각 이미지가 현대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유발시킨다는 점을 우려하며 자연의 색에서 구원을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색채 묘법’이라 불리는 그의 후기 작품들은 숱한 손짓의 반복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마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고요한 색면의 풍경을 펼쳐낸다. 캔버스 위에 규칙적으로 반복된 색의 고랑들은 작가가 묵묵히 반복한 ‘무목적성 행위’의 결과물이다. 몸을 써서 이뤄내는 수행과 정적인 상태로 이끄는 명상 등 박서보의 작품이 품은 덕목들은 현대인이 갈구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화가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다.

작가의 유족이 이끄는 박서보재단(이사장 박승호)은 고인을 예술적으로 기억하는 ‘데드마스크(Death Mask)’의 전통 대신 3D스캐닝으로 박서보의 생전 모습을 기록했다. 이를 토대로 벤치에 걸터앉은 노년의 박서보를 재현했다. 물감이 잔뜩 묻은 티셔츠, 민머리와 지팡이, 밝게 웃는 표정까지 생전의 화가와 똑같은 모습이라 울컥할 정도다. 전시장 방문객들은 마치 살아 돌아온 작가를 마주한 양 옆에 앉아 기념 사진을 찍곤 했다.

더 큰 특별함은 LG OLED TV 앞에서 경험할 수 있다. TV 앞에 T자형으로 설치된 아크릴 패널이 마치 시골 마을의 정자 앞 평상처럼 사람들을 불러 앉히는 장면이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는 전 세계 30여 개국 120여 개 갤러리가 참여했고 수천 점의 작품이 관객을 맞고 있다. 코엑스 3층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 외에도 1층에서는 200여 개 갤러리가 참가한 ‘키아프 서울’이 같은 기간 열렸다. 예술 감상의 즐거움이 자칫 ‘예술 피로’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관람객들은 코엑스 C홀과 D홀의 연결부에 자리 잡은 이곳 LG전자의 이번 특별전 부스에서 박서보가 빌려온 자연의 색이 펼쳐지는 TV 앞에 즐겨 머무르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곤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 등 행사장을 찾은 손님들이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다. 오혜원 LG전자 MS경험마케팅 상무는 “LG OLED TV가 박서보의 세계로 들어가는 창이 되어 기술과 디지털 세대의 감성을 통해 그의 유산을 새롭게 조명하길 바란다”고 소개했는데 의도 이상의 효과를 가져온 듯했다.

수백만 개의 발광 화소로 색을 구현하는 LG OLED는 박서보가 추구했던 자연의 빛을 그대로 재현한다. 인공이 만든 자연이라는 역설적 장면이다. 단순히 작품의 재현을 위한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 아니다. 프리즈의 열기 한복판에서 LG OLED 앞의 아크릴 평상은 작은 쉼표였다. 빛을 더할수록 색은 소음을 덜어냈다. 모두의 ‘단풍색’이 한 예술가의 경험을 공동의 기억으로 옮겨 놓았고 기술이 구현한 화면은 위안의 창문으로 바뀌었다. 예술은 소유 경쟁이 아닌 향유와 치유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술이 인간을 비추는 동안, 예술은 인간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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