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권과 주주는 다르다: 권리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

2025-03-24

'주주권'과 '주주'는 다르다. 주주권이 주주에게 부여된 제반 권리라면, 주주는 특정 회사 주식을 보유한 지배주주와 비지배주주(소수주주) 모두를 일컫는다. 주주권은 의당 법에 따라 공정하게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국장에서의 소수주주권 훼손에 대한 상흔은 오래고, 깊다. 누차 말하지만, 현재와 같은 국장의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 불공평한 주주권은 실질적으로 공평해져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계속 방치된다면 한국 자본시장의 존립 기반마저 흔들릴 수 있다. 자본시장이 흔들리면 한국기업과 더 나아가 한국경제도 흔들릴 수 있다.

최근 한국은행은 '주주환원 정책이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주요 16개국을 비교 분석한 후 한국 자본시장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i) 기업가치: PBR과 토빈Q로 볼 때 한국의 기업가치는 최하위 수준이었다. 한국보다 저조한 나라는 아르헨티나와 러시아뿐이었다. (ii) 주주보호: 개별 기업의 주주보호 점수를 바탕으로 국가별 평균 점수를 산출한 결과 한국기업의 평균 주주보호 점수(6.8)는 16개국 중 12위를 기록하며 하위권에 위치하였다. (iii) 주주환원: 한국 기업들은 배당도 적게 지급하고 자사주 매입도 소극적으로 실시하는 등 주주환원에서 최하위였다. 한국기업의 배당 성향(27.2%)은 아르헨티나(27.4%), 튀르키예(30.0%)보다 낮았다. (iv) 자금활용: 한국 기업들은 주주환원에는 소극적이나 자본적 지출 활동(0.9)은 인도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았다. 일반적으로 주주보호 수준이 미흡한 경우 여유자금을 주주환원에 활용하는데 소극적이고 현금성 자산 보유비중이 높은 경향이 있다.

한국은행 보고서를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국기업들의 주주권 보호 수준은 낙제점이다." 따라서 모두에서 언급했듯 한국의 '(소수)주주권 제고의 당위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에 가깝다. 지금 당장 필요한 논의는 '어떻게' 글로벌 평균 수준 이상으로 제고할 것인가로 모아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멈춰 생각해 볼거리가 있다. 즉 '무형적 권리인 주주권'과 '유형적 존재인 주주(투자자)의 책임'에 관한 병렬적이며 포괄적 문제 인식이 그것이다. 권리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인 까닭이다. 인류 근대성의 원리는 이러한 권리와 책임의 대칭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권리와 함께 책임도 상응하는 수준으로 커져야 한다는 얘기다. 닭 달걀 논쟁일지 모르나 권리보다 책임이 우선될 때 권리 투쟁의 사회적 설득력도 담보할 수 있다.

인류사에서 권리와 책임의 비대칭으로 인한 수많은 반면교사를 찾을 수 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사건들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대혁명은 절대왕정에 맞선 시민들의 권리 쟁취 투쟁이었지만 혁명 이후 들어선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정권은 혁명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권리와 함께 권력을 쟁취하자 혁명 반대세력에 대한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결국, 1794년 '테르미도르의 반혁명'에 의해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권리와 책임의 비대칭적 상황에서 쟁취된 권리는 오히려 역사 발전을 퇴보시킬 수 있음을 알려 준 사건이다. 서구사회의 근대성은 이러한 정반합의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교훈 속에서 축적되고 내재화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서구사회와 같은 근대성의 진화와 발전 궤적을 경험하고 내재화하지 못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서구 근대성의 산물인 각종 민주적, 자본주의적 제도들이 무분별하고 중첩적으로 수입되거나 이식되었다. 전(前)근대적 토양에 근현대적 종자가 파종된 장면과 유사하다. 여러 부문에서, 근대의 산물인 '권리와 책임의 대칭성' 부재로 인해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과도하게 부담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대표적으로 '언론자유의 권리'와 '언론사(기자)의 책임'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적 권리로서 의당 보장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언론사와 기자의 책임과 윤리의식도 그와 상응한 수준으로 고양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언론 권리의 오남용으로 인해 민주적 제반 질서가 위협받고 불요불급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이러한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민주주의 약화는 언론 자유 억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언론의 무책임한 가짜뉴스 생성, 왜곡된 정보 유통, 광고주에 포획된 언론사, 포퓰리즘과 결합된 각종 뉴스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밖에도 다수의 유사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국가 권력과 공무원의 책임, 교권과 교사의 책임, 학생인권과 학생(학부모)의 책임, 노동권과 노조(노동자)의 책임, 입법부의 권리와 국회의원의 책임, 사법부의 권리와 법조인의 책임, 동물권과 동물 보호자의 책임 등이다. 위 문제들 모두 권리와 책임의 대칭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것이 비대칭적일 때 그렇게 획득된 해당 권리는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 자해(自害)와 타해(他害)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위 권리와 책임의 대칭성 원리는 소수주주권과 소수주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언론권 확대가 민주적 질서를 훼손했듯이 소수주주권 확대가 자본시장과 기업경영의 질서를 얼마든지 훼손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우리보다 앞서 경험, 학습했던 금융 선진국들에서 '책임투자(Responsible Investing)'가 발전해온 배경이다. 자본주의 시장 기제의 최대 수혜자이자 키 플레이어들인 연기금 중심의 기관투자자들이 이를 선도하고 있다. 자신들의 플레이그라운드인 자본시장을 지켜야 결국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이기적 권리와 시장적 책임 의식에 근거한다.

최근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크게 환영한다. 하지만 자본시장 문제는 일차방정식이 아닌 초고차방정식이다. 상법개정은 난해한 방정식 풀이의 인수분해에 불과하다. 이제 상법 개정으로 소수주주권 보호의 토대가 만들어졌으니, 그다음에는 기관투자자들의 책임있는 투자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필자는 그것이 한국에서 아직껏 맹아조차 움트지 못한 '책임투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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