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덫

2025-05-19

한 집에 작가가 태어나면 그 집안은 끝장난다고 한다. 자전적 소설이나 수필은 좋든 싫든 가족사가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항의나 질타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예도 있다. 어느 작가는 엄마의 이야기로 책을 내자 형제들이 출판사에 출판 금지를 요청했다. 같은 자식이지만 엄마의 과거가 모두에게 동일한 감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들의 고충은 가족사만이 아니다. 왜 허락도 없이 타인의 개인사를 썼느냐고 항의하는 지인들도 있다.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유형들은 허락을 구한다 해도 용납할 리 없다. 물론 작품 속 등장인물의 모델로 설정해도 작가가 기사를 쓰듯 사실 그대로 쓰는 건 아니다. 허구를 덧대어 전혀 다른 인물을 창조해도 누군지 순식간에 알아맞히는 영험한 독자들이 있고 본능적으로 자기가 모델임을 알아차리는 이도 있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의 연애 경험으로 작품을 썼다가 전 연인에게 타인의 개인사를 무단 사용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해 법정에서 패소했다.

타인의 삶, 훌륭한 글감이지만

무단 활용하면 명예훼손 소송

친구여, 문학소녀 꿈을 잊었나

내가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소송 사례를 처음 본 것은 1990년대 핵물리학자를 모델로 한 소설이었다. 작가는 모델의 가족들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피소되었다. 작품은 소설보다 평전에 가까워서 많은 이들이 작품 속에 기술된 그의 삶과 죽음을 사실이라고 믿었다. 그때 판결은 “글의 흐름상 모델의 명예가 더 높아졌기 때문에 명예훼손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책의 서문에 모델의 실명을 거론한 작가의 몇 문장을 삭제하라는 주문이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채 모든 영화를 버리고 조국으로 달려와 핵 개발을 완료하려 했던 이○○”였다. 작가가 상업성을 의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문 덕분에 누가 반론을 제기하면 음모론을 들이밀기도 했다. 그는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이론 물리학자였고 한국에 오지도 않았으며 핵무기 개발을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때는 사법부가 작가에게 너그러웠던 것 같다.

요즘은 미담일지라도 모델의 허락이 없으면 소송으로 이어진다. 더욱이 타인의 명예훼손이 되는 경우라면 언급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의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를 순진하게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였다간 큰 낭패를 보게 된다. 개인의 사생활이나 비밀을 무단으로 묘사하거나, 허락 없이 개인 정보를 사용해서 일어나는 분쟁으로 작가도 출판계도 비상이 걸렸다.

문학에서 개연성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성을 뜻한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가 없으면 흔히 개연성이 없다고 말한다. 작가는 현실에서 소재를 가져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지어내지만 독자가 볼 때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감정이입이 발생해야 한다. 독자를 가장 쉽게 설득하는 방법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는 것이다. 작가가 아는 이야기처럼 확실한 게 또 있겠는가.

글을 잘 쓰는 어떤 작가는 사석에서 그런 말을 했다. 정말 쓰고 싶은 작품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나올 때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세상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냐고 농담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이 세상에 나오면 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다니 상상컨대 가족사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비밀이거나 이혼한 전 배우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 사는 일이 다 비슷하지만, 개인의 특별한 경험은 작품의 소재로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작가가 자신이 아닌 실존하는 타인에 대한 글을 쓸 때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 있었던 일을 사전 동의 없이 언급하거나 묘사하면 심한 경우 책이 폐기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도 소송으로 책이 분서갱유 되는 일이 있었고 실존 인물이 문제를 제기하자 그 부분을 삭제하고 책을 다시 인쇄하는 사례를 보기도 했다. 명예를 훼손한 것도 아니고 미담을 인용한 것임에도 타인은 지옥이 되어버렸다. 픽션·논픽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소송의 증가는 개인의 권리가 강화된 이유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작가는 물론 출판사도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항의하는 사람은 거의 친구들이다. 우리 중 누군가 작가가 되면 자기 이름을 작품 속에 넣어달라던 문학소녀들이었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캐서린’으로 불리던 친구가 얼마 전 수화기 너머로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내가 자기 이야기를 말도 없이 썼다는 질타였다. 나도 필멸의 존재를 불멸로 만들어줬더니 은혜를 모른다고 언성을 높였다. 내 책이 존재하는 한 너는 죽어도 사는 것이니 영광인 줄 알라고 했지만, 친구 입장에서 적반하장이었다. 말문이 막혔는지 나중에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큰소리를 친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한번 문학을 사랑했던 소녀는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고 가슴 속 어딘가를 서성거린다. 그렇지 않은가?

김미옥 작가·문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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