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잇따라 발표되고 있는 대미 주요 수출국에 대한 고관세 정책이 우리 경제에도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라는 전망이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자동차와 반도체 등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출 주력 분야가 일차적으로 태풍 속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강력한 대미 협상력을 가동하여 트럼프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는 한 가능하겠는가.
언젠가부터 우리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면서 해가 거듭될수록 수출 드라이브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문화예술 분야는 어떤가. ‘세계 문화 영향력 7위 국가’, ‘콘텐츠 산업 수출액 124억 5,000만 달러(2021년 기준)’라는 미국 언론의 발표는 우리나라 문화예술 분야도 트럼프의 관세 폭탄 사정권에 진입시키는 일종의 데이터로 작동할 수 있으나, 다행히 이번엔 제외되었다.
하지만 ‘문화강국’으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이 연평균 5.6% 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이와 맞물려 대미 수출 역시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팩트’가 트럼프 행정부의 또 다른 조치로 결과지어질 소지가 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대비 역시 필요해진다.
우리 경제가 목도하고 있는 외부적 상황을 살펴보면서 문화예술 분야를 함께 끄집어낸 이유는 문화산업의 근간이 되는 순수예술(기초예술) 지원 재원인 문화예술진흥기금(문예기금)의 재정적 위기를 짚어보기 위해서다.
국내 문화산업이 질적·양적으로 팽창하면서 한편으론 미국 등 콘텐츠 수입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되는 현상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양질의 순수예술 콘텐츠를 만드는데 최대 재원인 문예기금의 중대성에 대한 언급은 어쩌면 사족(蛇足)일 수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재원 구조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문예기금의 실상을 정확히 진단한 뒤 근본적인 재원 안정화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문화산업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리고, 이것은 ‘문화강국’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문예기금은 문화예술진흥을 위한 사업이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성 재정으로, 주로 순수예술 진흥과 국제 문화교류, 문화기반 조성, 문화예술 향유 등에 쓰인다. 1973년 처음 선보인 문예기금은 지난 50년간 문학, 연극, 음악, 미술, 무용, 국악 등 순수예술 분야에 총 4조 3,232억 원이 투입되었다.
이러한 순수예술 분야 지원은 영화, 드라마, K팝 등 대중음악, 웹툰, 웹소설과 같은 소위 ‘K컬처’로 불리는 대중예술 장르의 산업적 성장과 발전에 원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문예기금이 우리나라 문화산업을 지탱하는 밑바탕인 동시에 뛰어난 예술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영감의 원천으로 작동하고 있다.
문예기금의 역할과 순기능적 측면을 감안하면 안정적인 재원 확보는 필수 요소로,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에서도 우선순위로 다뤄지는 게 맞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기금 적립금이 해마다 감소함으로써 수년째 재정 위기에 노출된 현실은 아이러니다.
재정 고갈에 직면한 문예기금의 주소는 적립금 규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2004년 5,273억 원에 달했던 문예기금 적립금은 이후 계속 줄어 2024년 말 현재 551억 원으로 20년 사이에 10분의 1 수준으로 격감했다.
문예기금 곳간이 비어가고 있는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헌법재판소가 2003년 공연장, 전시장, 고적 및 사적지 입장료 6% 모금 제도를 통해 기금을 조성토록 한 방식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이후 연 400억 원 규모의 기금 모금 행위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둘째, 기금 모금이 불가능해졌다면 다른 대체 재원을 발굴하는 정책적 시도가 뒤따라야 했으나 사실상 무위로 끝났다. 2004년부터 복권기금이 문예기금으로 새로 전입됐지만 소외계층 대상 사업에만 사용토록 제한됐을 뿐이다. 셋째, 기금 적립금을 확충하기는커녕 핵심적인 국고 지원 사업 일부를 문예기금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기금 운용에 재정적 제약을 초래했다.
재정 고갈 위기에 처한 문예기금은 근본적인 재원 확보 방안 보다는 매년 정부(문화체육관광부) 일반회계와 복권기금, 체육기금 등 외부 기금을 끌어다가 사업비를 충당하고, 부족한 사업비는 적립금을 털어 사용하는 상황이 기형적인 재원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문화예술계에서 ‘적립금 고갈은 시간 문제’라는 문화예술계의 우려는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문예기금의 재정 위기는 단순히 순수예술 퇴보에 그치지 않는다. 순수예술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수 많은 문화콘텐츠 산업을 넘어 문화가 뒷받침된 관광산업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쳐 국가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존재한다. 예술창작의 버팀목이 붕괴하고, 순수예술의 기본적 생태계 조성과 예술 인력 양성, 국민의 문화예술 향유에 치명타가 될 수 있음은 불문가지다.
문예기금 재원 안정화 방안의 열쇠는 정부와 국회가 쥐고 있다고 본다. 정부 전입금에 의존하면서 적립금을 사용하는 기이한 문예기금 재원 구조를 더 이상 방치해선 곤란하다. 정부는 문예기금 재원 안정화 방안을 문화예술정책의 우선순위로 올려 논의 구조를 조속히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국회 또한 문화예술진흥법 등의 법률을 통해 문예기금 조성 관련 조항의 개정 여부를 검토해야 할 시점이 됐다.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올라서는 데 기초적 기능을 하고 있는 문예기금과 관련한 정부의 재원 안정화 정책이 실종되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