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와 한반도...그 길 닿는 곳의 '연장'에서 '복원'으로[BOOK]

2025-10-17

문명교류학

정수일 지음

창비

실크로드는 고대부터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이어 준 범인류적 문명교류의 핵심 통로였다. 하지만 비행기로 하루 안에 전 세계를 날아다닐 수 있는 지금 실크로드의 교역로 기능은 크게 퇴색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2013년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실크로드 경제대’와 ‘21세기 해상실크로드’ 구상을 발표,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야망을 드러내면서 실크로드는 화려하게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과연 실크로드, 일대일로와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대부분은 한국으로의 실크로드 ‘연장’을 떠올렸다. 한반도는 실크로드 바깥의 외부 세계에 있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깐수’로 유명한 문명교류학 연구자 정수일(올해 2월 24일 작고)은 유작 『문명교류학』에서 실크로드는 한반도로의 ‘연장’이 아닌 ‘복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은이는 이 책에 “그간의 숱한 문헌자료와 유물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한민족의 광범위한 민족사적, 교류사적 외연성이 확인됨으로써 우리는 한반도 내의 실크로드가 훗날 어디로부터의 연장이 아니라 망각됐던 원래의 실존에 대한 복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확신하게 됐다”고 썼다.

중국 연변 태생인 그는 베이징대를 나와 한때 평양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84년 아랍계 필리핀인 ‘깐수’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 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복역했다. 2000년 출소 뒤 문명교류학 연구자로 활동을 이어 가면서 『실크로드학』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번에 출간된 『문명교류학』은 그가 생전에 집필, 교정까지 완료한 것으로 평생에 걸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다. 800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비단 실크로드뿐 아니라 문명진화론·문명이동론·문명순환론·문명충돌론·문명공존론 등 각종 문명담론에 대한 저자의 시각과 비판, 문명교류학 전반에 관한 광범위한 학문적 성과도 담고 있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가 편집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책에는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이어졌다가 지워져 버린 실크로드의 3대 간선(오아시스로, 초원로, 해양로)을 각각 복원하는 연구 결과가 상세히 소개돼 있다. 오아시스로의 동쪽 끝은 장안(현재 시안)이나 낙양(뤄양), 서쪽 끝은 로마로 인식된 게 통설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실제로 이 길은 중국을 벗어나 동쪽 한반도에까지 뻗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에서 유통됐던 명도전은 고조선 고지(故址)와 한반도 내에서도 출토됐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연나라의 수도 계(薊, 베이징 서남쪽 다싱현)∼청더∼랴오둥반도∼지안 퉁거우(환도성)∼동황성(강계)∼영변∼영원∼평양성에 이르는 ‘명도전길’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특히 고구려와 중국이 화전(和戰) 양면에서 빈번히 접촉했다. 전연의 수도였던 영주(현재 차오양)를 기점으로 평양까지 평활한 북로와 험하고 좁은 남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평양에서 한주(서울)와 금성(경주)까지 오아시스로가 확장됐다.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하나인 해상실크로드는 로마에서 중국 동남해안에 멈추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항로가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라고 정수일은 강조한다.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남방 유물의 유입과 해로를 통한 불교의 전래, 아랍·무슬림의 신라 내왕 관련 아랍 문헌 기록 등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실크로드 초원로의 경우도 고구려나 발해의 서변 출구인 중국 영주에서 평성∼오르콘강, 구륜박∼오르콘강 두 루트를 중심으로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나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별로 없는 데다가 연구마저 일천해 아직은 오롯이 밝혀진 바는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한국이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한반도와 실크로드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지은이 정수일은 생전에 범지구적 보편문명의 실현이라는 문명대안론의 구상과 실천 방도를 꾸준히 모색했다.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은 사안들이 『문명교류학』에 많이 포함돼 있지만, 이 또한 이 분야 학문 발전의 튼튼한 밑거름으로 성장촉진제 역할을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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