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는 허들링

2024-12-17

눈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녹지만, 어떤 눈사람은 기억의 방에 자리 잡고는 가끔 안부를 물어온다. 지난해에 발산역 부근에서 만난 눈사람이 꼭 그렇다. 밤의 고요한 계단에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눈사람. 엄밀히 말하면 그건 눈으로 만든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눈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는 형상이었다. 둥근 원 세 개로 몸을 이루고 털모자와 당근 코까지 한 눈사람. 그저 깜찍한 조형물로 남았을지도 모를 그 눈사람을 잊지 못하게 된 건 맞은편의 응답 때문이었다.

눈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거기 또 하나의 눈사람이 있는 게 보였다. 그 눈사람은 한 층 위에 있었는데 몸만 거기 있을 뿐 온 마음을 아래로 전달하려는 것처럼 난간에 기댄 채였다. ‘잘 있지?’ 묻는 마음에 ‘응, 나도 널 보고 있어’ 하고 대답하듯이. 홀로 있는 줄 알았던 눈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 안쪽 깊은 곳이 뭉클해졌다.

1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감동을 거리에서 느낀다. ‘호그와트 졸업생 일동’과 ‘똥강아지 산책 연합’ ‘밀크티를 포기 못 하는 유당불내증 연합’ 같은 위트 넘치는 깃발 곁에서, 알록달록 응원봉에 소중한 메시지를 적어넣는 마음 곁에서. 핫팩과 커피와 키즈버스를 준비하는 손길 곁에서. 사회 구성원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했을 이 경이로운 시위 문화 속에서 배우고 안도한다.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들은 극한의 추위 속에서 체온을 지키기 위해 ‘허들링’을 한다. 겹겹이 둥글게 모여 서로를 끌어안는 것이다. 무리의 가장 따뜻한 중심에는 어린 펭귄들이 머물게 한다. 지키고 싶은 것, 온기와 정성이 더 필요한 것을 그렇게 품는다. 2024년 12월, 거리로 나와 말하고 듣고 나누는 사람들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몸처럼 품어 지키고 싶은 것, 멈춰서는 안 되는 것, 바로 민주주의라는 생물이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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