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계기로 중동이 글로벌 인공지능(AI) 파워의 핵심 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국가들이 최첨단 AI 칩을 손에 넣으면서 미국과 중국 등 2강을 이을 제3의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14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은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2년 뒤인 2027년까지 매년 50만 개의 엔비디아 AI 칩을 공급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계약을 놓고 아랍에미리트(UAE) 측과 사전 합의를 봤다고 보도했다. UAE의 AI 기술기업인 G42에 전체 공급량의 20%를 할당하고 나머지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오라클 등 현지에서 데이터센터를 짓는 미국 기업에 배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양국 간 계약 기간은 2030년까지 유지돼 공급되는 칩 수가 수백만 개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주목할 대목은 내년 출시를 앞둔 엔비디아의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루빈’도 공급 대상에 포함됐다는 점이다. 루빈은 엔비디아의 대표 AI 칩인 호퍼, 현재 주력 모델인 블랙웰의 뒤를 잇는 차세대 AI 칩 시리즈로, 성능은 호퍼의 900배로 알려졌다. 계약이 실제 이행될 경우 UAE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AI 칩을 확보하게 된다.
앞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설립한 AI 투자사 휴메인은 엔비디아의 블랙웰 1만 8000개를 공급받기로 했으며 미국 AMD로부터는 총 100억 달러(약 14조 원) 규모의 칩과 소프트웨어를 구매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와 구글·퀄컴·오라클·세일즈포스·오픈AI 등 미국의 대표적인 빅테크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순방 과정에서 사우디·UAE와 수백억 달러의 계약을 잇달아 성사시켰다. 중동 AI 산업이 미국 빅테크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퀀텀점프’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로이터는 “중동은 (트럼프 대통령의 순방을 계기로) 글로벌 AI 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을 잇는 제3의 중심지로 떠오를 것”이라고 짚었다.
대표적 산유국인 사우디와 UAE는 석유에 의존해온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해 AI와 데이터센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석유 등 화석연료로 거둔 수익을 미래형 산업 전환에 쏟아붓는 것이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2030년께 사우디와 UAE가 AI로 벌어들일 수익이 각각 1350억 달러, 960억 달러로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두 국가 모두 정부가 중심이 돼 투자 확대를 이끌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기요금이 낮아 데이터센터 운영에 유리한 것도 장점이다. 풍부한 일조량을 자랑하는 사우디는 지난해 태양광발전의 균등화발전비용(LCOE)이 ㎾h당 0.01달러 수준으로 매우 낮아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두 나라는 마치 라이벌처럼 경쟁적으로 AI 인프라를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중동의 수요를 파악한 트럼프 행정부가 AI 칩을 (대미 투자를 이끌)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중동 AI 협력 확대가 외려 중국에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사우디와 UAE에서 중국이 경제적 영향력을 넓히고 있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 산하 ‘FDI마켓’에 따르면 중국은 2021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사우디에 216억 달러를 투자했으며 이 가운데 약 3분의 1이 배터리, 태양광·풍력 등 청정에너지 기술 분야에서 이뤄졌다. UAE의 G42 역시 중국 화웨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지난해 화웨이와 협력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으로 MS로부터 15억 달러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샘 윈터레비 연구원은 “중동을 미국의 첨단기술 파트너로 삼기에는 위험 부담이 상존한다”고 지적했다.